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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205 종래에는 주로 서북면에서 황해도⋅경기도⋅충청도로 쳐내려 가던 공격로를, 이 제 이와 병행하여 동북면에서 東州(鐵原)→ 春州(春川)→ 忠州에 이르는 공격로를 병행해 가면서 고려 전체를 전장으로 확대해 갔다. 전투는 1253년 7월부터 1254년 초까지 계속되었는데, 1253년 8월 12일에 西海道(황해도)의 椋山城을 도륙하고 내 륙으로 들어가서 8월 27일에 東州(鐵原)을 함락시켰다. 이때 東州山城에는 인근의 金城⋅金化 등지의 주민들도 함께 入保하고 있었는데, 江都政府로부터 白敦明이라 는 防護別監이 파견돼 전투지휘를 하고 있었으나 蒙古軍이 당도하자 싸우지도 못 하고 무너져 버렸다. 이어서 9월 20일에는 按察使 朴天器의 지휘하에 결사항전하 던 춘천의 春州城(봉의산성)이 함락되어 주민들이 무참하게 살륙되었다. 蒙古軍은 봉의산성을 다중으로 포위하고 맹공을 하면서 목책과 참호를 이중, 삼 중으로 시설하여 城內 군민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십 수일 동안 식량이 고갈 되기를 기다렸다. 산성내의 식량이 떨어지고 먹을 물조차 고갈돼 더 싸울 힘이 없 게 되자, 文學 曹孝立이 아내와 함께 불에 뛰어 들어 자살하고, 이어서 마지막 돌 파를 시도한 박천기가 조직한 결사대의 전투도 무위로 끝났다. 鳳儀山城을 전장으 로 하는 춘주성 항전세력들은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도륙당했다. 이해 9~10월 몽골군은 춘천을 거쳐 남하하면서 원주․충주까지 진격하였고, 동 북면에서 남하한 부대는 안변․통천․양양을 거쳐 삼척 부근까지 이르렀다가 퇴 각하였다. 한편 이후 몽고 내부의 갈등으로 인한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1287년에 있었 던 나이얀(乃顔)의 반란도 그것중 하나이다. 1290년 나이얀의 한 부장인 카단(哈 丹) 45) 의 고려 침입도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고려에 침입한 哈丹은 고 성, 양평, 원주 등지에서 횡행하였으나 춘천지역에는 직접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 나 전쟁의 긴장이 감돌던 시기였으므로 춘천지역에서도 방비시설 점검 등 어떤 대비가 있었을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고려말에 이르게 되면 하삼도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극심한 왜구들의 약탈적 침입이 빈번하였고, 급기야는 내륙지역까지도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고려말 忠定王 45) 칭기스칸의 동생 카치군(哈赤溫)의 손자로 1287년에 나이얀(乃顔)과 더불어 반기를 들어 쿠빌라이칸의 군대에 대항하였으나 결국 쫓겨 嫩江, 洮兒河와 松花江 등지를 헤메다가 고려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元軍과 고려군의 합동토벌전에 쫓기다가 1292년 이후에 자취를 감추고, 1301년 그 손자인 토곤(脫觀)이 원나라에 투항함으로써 난은 끝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