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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203 한 고고학적 조사에서 얻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신라가 우두산성을 사용 한 흔적이 전혀 없다면 신라는 춘천에 진출한 이후 대체로 봉의산에 방어시설을 설비하고 주둔하였을 것이며, 우두산성을 신라가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면 이는 신라가 춘천에 진입한 이후 기존 세력이 사용하던 우두산성을 계속 재사용하다가 문무왕대에 봉의산에 산성을 신축하고 주근거지 城을 이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신라가 우두산성을 사용하다가 江 남쪽이며 더 험준한 봉의산으로 이전한 것이라는 가정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신라는 남쪽에 근거지(수도)를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당나라와의 전쟁이 더욱 격화되어가는 위기 상황에 봉착하면서 더 험준하고 견고한 요새지가 필요했고 더구나 江 북쪽이어서 배수진이 되는 우두산보다는 전면에 강을 두고 지킬 수 있는 봉의산 쪽이 전투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가 주요 방수지를 봉의산성으로 옮긴 이후 언제까지 이 산성이 사 용되었을까. 주양성(봉의산성 비정)은 대내외적인 큰 위기감 속에서 축조된 성곽이 기 때문에 이 당시 산성은 곧 治所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의 전쟁 종결과 여러 국내외적인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산성에서 治所施設(지방행정관아)은 城下地帶로 나오고 산성은 순수한 군사적 기능만을 갖는 군사시설로 관리되었을 것이다. 그러 나 봉의산성은 몽고침략을 계기로 하여 폐철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Ⅳ. 후삼국~고려시대 춘천의 군사적 거점 통일신라기에 고착된 지역거점성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려시 대에 들어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다만 신라말기 전국 각지에 많은 지방세력이 할거할 당시엔 각 세력의 입장에 따라 기존의 신라성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다른 근거지를 만들어 거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특히 반란세력의 경우, 기존의 신라성 을 탈취하거나 아니면 군사력이 열세일 경우는 험준한 곳에 거점을 만들어 주둔 또는 병참기지로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아마 원주의 치악산에 있는 산성 (금두산성 혹은 영원산성)이나 춘천의 삼악산성이 궁예집단과 연결된 구비전승이 있는 것도 그러한 사정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삼악산성에 대한 조사 에서 삼악산성 내성의 경우는 사용시기를 9세기까지도 소급하여 볼 수 있다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