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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201 거점으로 춘천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또한 신라말기인 경명왕 5 년(921)에는 말갈의 일부인 達姑의 무리가 북쪽 변경을 침략하자, 이때 왕건의 휘 하 장수 堅權이 삭주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해 대파함으로 써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33) 고 한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신라가 삼국통합 직후인 673년에 춘천에 새로 走壤城을 축조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신라가 어느 시기에 춘천에 진입하였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미 6세기 중엽에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춘천에 진입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 라가 춘천지역을 어떠한 방법으로 접수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춘천에 맥국이 있 었다면 신라 초기의 우호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34) 저항없는 통합의 가능성도 있지 만 많은 시기적인 격차가 있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673년 신라 가 춘천에 주양성을 새로 축조하였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 어떤 중대한 변화가 초 래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신라는 춘천 진입 이후 기존의 토착세력이 사용하던 성곽(우두산성으로 비정)을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춘천이 공식적으로 신라에 편입되는 시기인 637년 부터 계산하면 신라는 적어도 30여 년 이상은 기존의 성곽시설을 사용하였을 것 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신라는 이 시기에 새로 성곽을 축조하였던 것인가. 이는 당시 신라가 처한 상황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신라는 삼국통합을 마무리하 는 단계에서 백제․고구려 공격에서 동맹관계였던 당나라와 결별하고 오히려 적 이 되어 대규모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특히 671년 당군과 말갈군은 압록강 남쪽 으로 쳐들어와 그 이듬해 7월에 평양을 점령한 다음, 곧이어 8월에는 한시성과 마 읍성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위협했다. 35) 이렇게 위기감이 크게 고조되면서 신라는 기존의 방어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과 개편에 들어갔다. 672년 한산주의 晝長 城 축조를 비롯하여 沙熱山城의 증축, 춘천(당시는 首若州)의 走壤城을 비롯하여 國原城, 北兄山城, 召文城, 耳山城, 主岑城(達含郡), 萬興寺山城(居烈州), 骨爭峴城 (歃良州) 등을 축조한 것은 바로 그러한 심각한 위기의식 속에서 기존의 방어시 33) 삼국사기 제12권 신라본기 경명왕 5년 2월. 34) 三國史記 卷 第一 新羅本紀 第一 儒理尼師今. 「十七年 秋九月 華麗· 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 獻之」. 35) 三國史記 卷 第七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十二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