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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195 는 州를 설치하고 武力(金庾信의 祖父)으로 軍主를 삼았다. 新州란, 신라가 한강유 역에 진출하여 제도지역화한 행정구획인데, 그 州治는 廣州였고 그 장관은 軍主였 다. 따라서 한강유역은 백제에 이어 고구려, 고구려에 이어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 다. 또 이와 거의 같은 시기인 556년(진흥왕 17) 7월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안변 까지 진출하여 比列忽州를 설치하고 沙湌 成宗을 軍主로 파견하였다. 이후 신라의 중부내륙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공략으로 마침내 춘천지역도 637년(선덕왕 6)에는 신라의 牛首州가 설치되고 10) 군주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춘천에 진입한 것은 그보다 앞선 시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곳 을 중심으로 이곳의 지역세력이나 고구려와 상당기간이 공방전 또는 군사적 긴장 관계를 거쳐 이곳이 보다 안정적으로 점령되고 이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州를 설치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월이나 정선에서처럼 6세기 이전의 신라유적이 춘 천에 뚜렷하게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마 이러한 사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11) 그렇다면 신라가 춘천에 진입하여 춘천을 점령하기 이전에 춘천에 근거를 가 진 세력집단이 어느 곳을 주요 군사적 거점으로 삼았을까 하는 문제를 살펴보도 록 하자.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당시 춘천에 웅거한 세력집단이 어느 곳 에 중심적인 治所를 두었던 것인가 하는 문제가 먼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초기에 춘천에 근거지를 가진 세력집단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종족 또는 집단 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말갈인지, 낙랑인지, 맥국인지, 아니면 기타의 다른 집단인지는 아직 논의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기록에서 일찍부터 춘 천은 맥국의 중심지라고 일컬었고, 조선시대의 각종 고지도에서는 貊都를 춘천의 신북읍 발산리 일대로 표시하여 왔다. 특히 발산리 북쪽을 둘러치고 있는 산맥에 서 흘러내려와 발산리 평지에 우뚝 솟은 작은 산 12) 의 남쪽에 闕址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조사된 고고학적 조사내용을 종합하여 보건대 그러한 기록이나 傳言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고 사 10) 삼국사기 新羅本紀 眞德王 元年條(647)에는 “원년 2월에 大阿湌 守勝으로 牛首州 軍主 를 삼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우수주를 처음 설치하고 군주를 둔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이미 우수주를 설치하고 다른 사람을 군주로 두었다가 이때 와서 大阿湌 守勝을 파견한다 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1) 강원도사편찬위원회, 강원도사 3(고대) 제8장 3절 ‘신라관련 유적과 유물’ 참조. 12) 이 산을 ‘발산’이라고 칭하기도 하나 조선시대 고지도에는 발산리 북쪽을 둘러친 높은 산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을 ‘鉢山’이라 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