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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춘천의 군사적 거점과 가치 194 군사연구 제130집 데 8) , 이를 통하여 당시 춘천을 비롯한 홍천․낭천(화천) 등 북한강 유역의 주요 지역이 낙랑․백제․신라․고구려 등의 주요 쟁탈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백제는 溫祚集團이 한강유역에 근거를 정하고부터는 동북으로 낙랑과 말갈, 그리고 남으로는 마한과 빈번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으로는 牛 頭城(춘천), 북으로는 甁山柵(안협)을, 동북으로는 斧峴城(평강)을 전초기지로서 확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9) 한편, 동남으로는 신라의 娘子谷城(청주)과 蛙山城 (보은)과 駒壤城(괴산) 등에 진출함으로써 신라와는 소백산맥을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하게 된다. 이후 한강일대를 비롯한 중부지역에서는 백제와 말갈, 낙랑, 고구려가 주로 군사 적인 대결을 벌였으며, 고구려 비류왕대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모두 고구려에게 소 멸되면서 주로 백제와 고구려가 대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관미성 전투 이후 浿水의 위(臨津江 上流)에서도 대승함으로써 漢水이북이 점차 고구려의 판도 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결국 한반도 중부지역의 가장 현저한 자연적인 지형물 가운데 하나인 한강 일대가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쟁탈전에서 주요 군사대결의 격 전지가 되었음을 의미하며, 결국 그 연장선상에 있는 북한강도 양국의 패권다툼 가운데서 상당 기간동안 군사적 분계지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는 6세기 중반경까지 대체로 백제와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고구려에 대항 하였지만 550년 고구려․백제의 공방전을 틈타 道薩城․金峴城을 차지하였고, 이 어 진흥왕 12년(551) 신라는 居柒夫에게 명하여 고구려가 영유한 한강 이남의 10 郡을 점령하는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대개 백제가 한강 하류방면이었다면, 신라는 한강 중상류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한강의 중상류 유 역에 위치한 주요 고구려 城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당시 신라는 조령-죽령과 태백산맥을 경계로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와의 공동작전을 펴면서 신라는 조령과 죽령, 대관령을 넘어 충주, 단 양, 제천, 원주, 영월, 평창, 횡성, 홍천, 춘천, 양구, 인제, 화천 등 남한강과 북한강 중상류 지역을 장악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백제의 공동작전으로 이들은 한강유역에까지 진출하였으나 2년 뒤인 진 흥왕 14년(553 ; 백제 성왕 31) 7월, 신라는 돌연 백제의 東北鄙를 빼앗아 新州라 8) 大東地志 卷15, 江原道. 9) 江原道史 (1995), 428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