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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185 고 북만주의 신민부 등 3개의 독립운동단체로 통합되어갔다. 1924년 5월 출범한 참의부는 집안현을 중심으로 압록강 연안 서간도지역의 15,000여 교포사회를 관할구역으로 민정조직과 군사조직을 동시에 갖춘 일종의 독립된 자치정부로 발전하였다. 남만 북부지역의 또 하나의 통합독립운동단체 로 1924년 11월 출범한 정의부는 하얼빈과 액목현을 경계로 그 이남의 17,000 여 호 87,000여 명의 교포사회를 관할구역으로 활동하였다. 북만주에서는 1925 년 3월 영안현에서 새로운 통합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신민 부가 결성되었다. 신민부는 중동선 일대를 중심으로 동서로 장춘에서 구참까지, 남북으로 백두산에서 흑룡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수십 만 한인들의 자치활동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참의부․정의부․신민부 이들 3부는 일제의 세력이 강하게 미친 북간도 일부 를 제외한 전체 만주지역의 한인사회를 3분하여 통치한 사실상의 정부였다. 이 들은 한인교포사회에서 선출된 임원으로 입법․사법․행정부의 삼권분립체제를 갖추고, 징수된 세금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자치를 통해 한인사회의 안정을 기하고 군사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장기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대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상해 임시정부가 인민과 영토가 없는 상징 적인 정부였다면 이들 삼부는 어떤 의미에서는 주권과 인민과 영토 나아가 군 사력까지 갖춘 실질적인 공화주의 자치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부는 한인사회의 자치와 동시에 항일무장투쟁이라는 두 개의 과제 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만주라는 새로운 정착지로의 생활터전에서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바라는 재만 한인사회의 요구를 무시하고 기존의 항일투쟁에 전 념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전까지의 치열한 무장투쟁과는 그 방향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청산리전쟁 이후 일제의 적극적인 탄압과 삼시협정(三矢協 定)으로 인한 중․일 양국의 압박은 국내진입작전과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을 더 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와 함께 삼부 성립 시기부터 존재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은 삼부체제에 좌우세력의 분화와 대립의 극복이라는 또 다른 해결 과제였다. 이 같은 현실에서 삼부는 즉각적 항일투쟁보다 준비를 통한 장기적 투쟁방향 으로 선회하고, 그 구체적 방안의 하나로 자신들의 활동구역을 보다 안정적으 로 보호 유지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항일무장투쟁 자체가 투쟁의 지속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