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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84 군사연구 제130집 춘사건을 빌미로 1920년 10월 간도출병을 단행하고, 독립군과 그 기반인 한인 사회를 초토화시키기 위해 경신참변(간도참변)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1920년 10 월 20일경 독립군부대가 백두산록의 화룡현 이도구․삼도구 일대에 집결하자 사전정보를 입수하고 토벌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독립군연합부대는 10월 21 일 청산리의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26일까지 완루구․천수평․어랑촌 등지에 서 격전을 펼쳐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전쟁은 이 일대에서 6일간 10여 회에 걸쳐 치러진 독립군이 거둔 승첩을 통칭하는 것이다. 독립군은 무기와 병력면에서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고 국내진공작전 및 만 주지역의 전투에서 일본군 정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독립군이 이같은 쾌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필사즉생의 정신력과 투지, 지형과 지세를 적절히 활용한 전략과 전술, 한인사회의 군수지원과 정보제공 등의 헌신적 노력, 근대 적 무장을 통한 군사력 향상 등 제반 여건이 수반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독립군부대의 승전은 한마디로 독립군과 재만 한인사회 구성원 전체의 민족해 방을 향한 끊임없는 염원의 결과물이었다. 청산리전쟁에서의 대승 직후 독립군부대들은 일본군의 공격과 보복으로 인한 한인 교포사회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개별부대들의 통합에 의한 효과적인 투쟁 을 위해 새로운 근거지로의 장정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이 단일편제 로 통합 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은 밀산에서 연해주․이만을 거쳐 노령 자유시로 이동 집결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벌어진 자유시사변으로 인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거점 마련과 통합군단에 의한 항일독립투쟁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 다. 또한 같은 해 4월 북경군사통일회의의 유회로 전민족적 통일무장세력 결성 을 통한 항일전쟁의 희망이 좌절되자 재만 독립운동단체들은 새로운 활로 모색 을 위해 만주지역만이라도 통합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에 1922년 1월 남만통 일회의를 개최하고 통합독립군단인 대한통의부(통의부)를 결성하였다. 통의부의 항일무장투쟁은 군사조직인 의용군을 통해 펼쳐졌다. 통의부 의용 군은 1920년대 전반기 국내와 만주를 무대로 국내진입작전과 함께 친일파 내지 일제 밀정(密偵)을 처단하는 핵심부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대한의군부를 조직 한 복벽파의 탈퇴에 이어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한 의용군 간부들의 이탈로 대 한통의부는 분열과 침체에 직면하였다. 이에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는 재차 통합운동을 추진하며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남만주의 참의부와 정의부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