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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183 로군정서는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근거지를 두고 병영과 사관연성소를 설치 하였다. 서간도지역의 대표적 항일무장단체로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을 들 수 있 다. 서로군정서는 민정담당의 정무청과 군사담당의 군정청을 설치하고, 산하에 독립군사령부를 두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본격적으로 독립군 간부 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에 편성되어 국내 진입작전을 비롯해 이후 독립전쟁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하현 삼원보에서 결성된 대한독립단은 국내 각지와 서간도 일대에 지단과 지부를 두고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집해 1919년 8월을 즈음해서는 병력 1,500여 명의 대부대로 성장하 였다. 이들 외에도 동북만주 지역에는 1920년을 즈음하여 무려 40∼50여 개에 이르는 독립군단체가 활동하였다. 국내의 3․1운동을 계기로 만주 각지의 한인독립운동단체들은 오랜 숙원이었 던 독립전쟁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최초 국내진입작전은 1919년 8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다음해 봄까지 수시로 펼친 국내 진공작전에서 독립군부대들은 일본군 국경수비대와 함경도, 평안도 일대 의 일제 통치기구를 습격, 파괴하는 등 다수의 전과를 올렸다. 국내진공작전은 전과의 다소를 불문하고 만주 한인사회의 오랜 염원이었던 본토 수복을 위한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 그리고 지속적, 성공적으로 펼쳐졌다는 점에서 항일무장투쟁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독립군의 연이은 국내 침공작전으로 국경수비에 허점을 보인 일제는 독립군 의 색출 진압작전을 위해 1920년 6월 초 두만강 건너 간도에까지 불법 침입하 였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쟁은 이 과정에서 일본 정규군과 맞붙어 승리한 대표적 전투이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7일 일군 월경추격대대가 독립군 근거지 봉오동을 공격하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안무의 국민회군․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등의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유인 기습하여 궤멸시킨 만주지역 최 초의 승첩이다. 이 전투로 항일독립전쟁에서 승리의 가능성을 확신한 독립군은 지속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독립군단 간의 통합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병력과 군비 확충에 박차를 가하였다. 막강 화력을 보유한 정규군을 투입하고도 봉오동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제 는 독립군 초토화를 위한 근본적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에 자신들이 조작한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