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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82 군사연구 제130집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삼부 성립 시기부터 존재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 의 확산은 삼부체제에 좌우세력의 분화와 대립의 극복이라는 또 다른 해결과제 를 제시하였다. 이 같은 내외 안팎에 나타난 제반 현상은 만주지역의 민족해방 운동에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민족유일당운동으로 나타나 게 되었다. Ⅴ. 맺 음 말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한인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함으 로써 국내외 어떤 지역보다도 장기간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만주 각지 에는 19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한인 자치단체와 한인학교가 설립됨으로써 반 일역량의 축적과 함께 독립전쟁기지 건설의 기반이 마련되어 갔다. 이를 바탕 으로 국내에서 발발한 3․1운동과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만주지역 한인 독 립운동 단체의 무장투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으 로 민족적 저항의 잠재력이 폭발하고, 국제정세도 피압박민족의 해방에 고무적 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준비한 투쟁역량을 발휘할 때가 다가왔다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이와 함께 한인자치기구의 독립군 단체가 이전보다 한 단계 높은 근대적 무장력을 갖출 수 있게 된 점, 민족운동을 위해 수많은 우국 청장년층이 만주로 이주했다는 점, 만주지역에서의 수전농경의 개발로 한 인 이주민이 급증했다는 사실 등은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북간도 지역은 한인들이 가장 많이 밀집된 곳으로 강력한 독립군부대가 다수 결성되었다. 대표적 한인 자치단체인 간민회가 1919년 11월 대한국민회(간도국 민회)로 이름을 바꾸고 그 산하에 대한국민회군(대한국민군)을 편성함으로써 자 치와 독립투쟁을 일원화하였다. 국민회군은 보다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항일투 쟁을 위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최명록)의 대한군무도독부(통칭 군무도 독부)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로 조직되었다. 이와 함께 북간도 최강의 항일 독립군단으로 1919년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가 조직되었다. 대종교 인사들이 북간도로 망명하여 1911년 3월 왕청현에서 조직한 중광단을 모체로 설립된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