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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80 군사연구 제130집 여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1926년 12월에는 황일초․최보만․채근우 등이 하얼빈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고, 1927년에는 이병묵․신현규․손봉현 등이 국내의 경상도지역까지 침투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쳤다. 118) 신민부는 참의부․정의부 등과 합동작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신민부는 소강 상태를 맞은 민족운동의 활로를 찾고, 재만 독립군의 항전의식을 고취하자는 의 도에서 1926년 초 정의부 대표와 만나 3월 1일 국내진입작전을 단행할 것을 계획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또한 3월에는 신민부의 박관해가 정의부와 참의부를 방문하여 3부 합동의 군사작전을 펼치기 위한 군사적 밀약을 체결하였 다. 그리고 같은 달에는 액목현 산간지역에 신민부와 정의부가 공동운영하는 무 관학교를 설립하였다. 한편 1927년 4월에는 정의부와 연합한 후 러시아와 외교교 섭을 벌려 무기탄약 및 군수장비를 공급받을 계획을 추진하였다. 119) 그러나 신민부는 1927년 2월에 발생한 일제와 중국군의 신민부 본부 습격 피 해로 인한 수습방안 마련을 위한 12월 석두하자총회(石頭河子總會)를 계기로 김 좌진을 중심으로 한 군정파와 최호․김돈 등의 민정파가 둘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120) 이후 1928년 11월 발생한 빈주사건(賓洲事件)을 121) 계기로 두 계파는 완전한 적대관계에 이르게 되고 이로 인해 신민부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어 갔다. 군정파는 1928년 12월 이탈하여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중심세력이 되었 고, 민정파는 1929년 3월 이탈하여 국민부에 참여함으로써 신민부는 마침내 와해 되고 말았다. 1920년대 초 만주지역 민족해방운동단체들의 통합기운으로 1920년대 중반 출 범한 참의부․정의부․신민부 이들 3부는 일제의 세력이 강하게 미친 북간도 일 부를 제외한 전체 만주지역의 한인사회를 3분하여 통치한 사실상의 정부였다. 이 118) 위의 책, 194쪽. 11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8, 296-97쪽. 120) 분열의 발단은 27년 2월의 석두하자의 신민부 본부가 일경찰과 중국군의 공격을 받고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김혁을 비롯한 다수의 간부가 체포되자 사건 수습방안을 놓고 12월 석두하자총회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자는 군정파와 민중 본 위의 자치를 실시하자는 민정파의 대립으로 야기되었다.(위의 책, 297쪽) 121) 1928년 10월 28일 빈주에서 한인 40~50명이 모여 중일의 탄압을 막고 생업을 영위하기 위한 자위대책을 협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좌진 이끄는 군정파는 이 회의를 민정파가 군정파를 음해하기 위한 회의로 오해하고 회의장소에 무장대를 파견해 황혁 등 여러 명 을 사살하고 다수의 한인들에게 중경상을 입힌 사건이다.(위의 책, 2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