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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179 지역에 50여 개의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한글교과서도 편찬하여 수신․지리․ 역사교육 등을 통한 민족교육을 실행하였다. 112) 또한 노동강습소를 통해 정규교 육을 받을 수 없는 이주한인들의 문맹퇴치와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는 한 편 과학적 영농 및 노동력 향상 방안을 계도하고 필요에 따라서 순회강연도 실 시하였다. 홍보활동으로는 1925년 4월 이후 기관지인 신민보를 순간(旬刊)으로 발행하여 중동선 일대는 물론 북간도에까지 배포하였다. 산업진흥활동으로는 실업부를 설치하고, 공농제(公農制)를 실시하여 농지의 공동경작을 꾀하였다. 또한 식산조합 및 소비조합을 설치하고, 가내 부업을 장려하였다. 113) 신민부는 자치활동과 더불어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양성과 무장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창립 이후 지방조직의 정비와 함께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 김좌진의 통솔 하에 근대식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5개의 보안대와 그 휘하에 별동대를 편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하였다. 신민부는 지속적인 독립군 간부 의 배출을 위해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도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1년에 2 기를 배출하는 속성과정으로 운영되었으며, 교장은 김혁, 부교장은 김좌진으로 약 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14) 독립군 간부의 양성과 함께 관할지역 내의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청장년을 대상으로 군구제(軍區制)를 실시하여 독립군 을 양성하였다. 또한 둔전제의 실시를 통해 청장년들이 생업과 동시에 유사시에 는 정규군으로 편입되어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115) 신민부는 무장투쟁선상에서 1925년 3월에 조선총독 사이토의 암살을 기도하였 으나 아쉽게도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1927년 8월 리중삼 등 특수공작대를 국내 에 밀파하여 일본 군경의 주둔배치 상태와 일본주재소의 위치를 파악하고 작전지 도를 작성하였다. 116) 북만지역의 친일단체의 습격과 친일한국인 암살에도 주력하 여 해림지역의 초대 조선인민회장 배두산을 처형한 것을 비롯하여 다수의 친일반 역자를 응징하였다. 117) 또한 국내와 만주지역에서 수시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 112) 현규환, 1967, 한국유이민사 , 485-87쪽. 113) 박환, 앞의 책, 190-93쪽. 114) 윤병석, 앞의 책, 271쪽. 115) 무장독립운동비사, 109쪽. 윤병석, 1989, 1920년대 만주에서의 민족운동과 군정부」, 한국 민족운동사연구 4, 147~153쪽. 116) 蔡根植, 1985, 武裝獨立運動秘史 , 民族文化社, 115~116쪽. 117) 박환, 앞의 책, 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