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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78 군사연구 제130집 적 방법을 자제하고 문화정책을 펴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한인사회의 안정을 통 한 민족해방운동의 안정적 근거지 확보를 위해 민정활동의 자치기관과 항일독립 투쟁을 전담할 혁명운동조직을 분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정의부는 민정과 군 정의 분리로 인한 조직 내부의 갈등과 아울러 1920년대 말 재만 독립운동단체들 의 민족유일당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107) 남만에서 정의부가 성립할 즈음 북만주에서도 1925년 1월 길림성 목릉현에서 독립운동단체 통합을 위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가 개최되었다. 북만지 방의 민족해방운동단체들은 김좌진․이범윤 등의 대한독립군단과 현천묵․김혁․ 조성환 등의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민선대표 김유성․이근․윤우현․박세황 등이 참여한 가운데 같은 해 3월 영안현에서 새로운 통합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창 립대회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108) 신민부(新民府)는 중동선(中東線) 일대를 중심으로 동서로 장춘에서 구참(九 站)까지, 남북으로 백두산에서 흑룡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관할구역으로 하 여 수십만 한인들의 자치활동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09) 중앙행정조직은 중앙집행위원회(행정기관)와 참의원(입법기관) 및 검사원(사법기관) 등으로 구 성된 근대적 삼권분립체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참의원과 검사원은 현실적으 로 운영이 어려워 중앙집행위원회를 주축으로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 다. 110) 지방조직은 북만주 전 지역을 관할지역으로 하였으므로 일시에 정착되기가 불가능하였다. 이에 영안․주하․목릉․밀산 등 중동선 지역을 1차로 조직하고, 액목․돈화․안도 지역 등을 2차로 하여 15개의 총판(總辦)이 설립되었다. 111) 신민부의 자치활동은 교육활동․홍보활동․이주한인의 산업부흥활동 등을 중 심으로 이루어졌다. 교육활동은 민족주의사상을 고취하고 항일민족운동을 한인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한 기반사업으로 출범 당시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되 었다. 1927년 8월에는 해림에서 북만한인교육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을 통한 독 립사상을 고취하고, 그 실천사업으로 주하․목릉․밀산․요하․돈화 등 15개 107) 신주백, 앞의 책, 87쪽. 108) 박환, 1991,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 160-69쪽. 109) 최형우, 1945, 재외조선혁명운동소사 1, 동방문화사, 79~80쪽. 110) 박환, 앞의 책, 169쪽. 1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8, 292-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