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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175 정의부 등과 독립군 통합운동을 추진하는 와중에 내부적 결속력이 약화되면서 무 장투쟁도 침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925년 6월 삼시협정(三矢協定) 91) 체결로 독립군에 대한 중일 양국의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진입작전을 일단 뒤로 하고 그 대신 만주에서의 대일항쟁 내지 친일단체를 척결하는 쪽으로 투쟁 방향을 선회했 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1925년 3월 16일 일제가 기습한 고마령전투 92)에서의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는 피해는 참의부의 투쟁노선을 군사활동에서 자치활동을 중시 하는 쪽으로 급격히 기울게 하였다. 또한 1928년 10월에 재무위원장을 지낸 한의 제와 고동호ㆍ독고욱 등이 참의부를 배신하고 선민부(鮮民府)라는 친일단체를 조 직함으로써 조직내부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93) 이 같은 여건변화로 인한 참의부의 쇠퇴는 이후 만주지역에 또다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계기 가 되었다. 남만주지역에는 압록강 대안 서간도지역의 참의부의 성립을 즈음해 남만주 북 부지역을 통괄하는 또 하나의 통합독립운동단체로서 1924년 11월 정의부(正義府) 가 결성되었다. 대한통의부는 공화파와 복벽파의 분열 및 의용군의 탈퇴에 따른 주만육군참의부의 성립으로 조직이 침체에 빠지자 분열된 조직의 재기를 위해 근 거지를 이동해 남만의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또한 상해 임정 의 국민대표회의의 결렬로 통합독립군단에 의한 일괄적이고 총체적인 항일무장투 쟁의 희망이 무산되자 한인 무장세력의 새로운 통합을 위해 1924년 7월 남북만 각지의 독립운동단체들과 협의하여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소집하였다. 이에 대한통의부를 필두로 통합에 동의한 대한광정단(광정단)․의성 단․군정서 등 8개 단체가 그해 11월 24일 화전현에서 전만통일회(全滿統一會)를 91) 삼시협정은 일제와 봉천군벌 사이에 벌어진 以華制韓정책의 대표적 예로 조선총독부 경 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봉천성 경무국장 于珍 간에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중일 양국은 경찰 등 무장대를 서로의 영토에 마음대로 월경시키지 않으며 무기를 휴대한 한인의 조선 잠입을 서로 방지하고, 중국에 있는 不逞鮮人의 단체를 봉천군벌이 체포하 여 인도해 주기로 합의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는 중국의 주권을 인정해 주었고, 중국은 일제의 간섭을 배제시킨 채 한인을 직접 탄압할 수 있게 되었다.(신주백, 위의 책, 40쪽) 92) 고마령전투는 집안현 고마령 산중에서 참의부 간부 및 대원들이 군사회의를 개최하고 있 을 때 일제 초산경찰대가 습격하여 벌어졌다. 급습을 받은 참의부측은 중대장 최석순 이 하 29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참의부는 4월의 대의원대회와 중앙의 회에서 진용을 개편하고 활동 방향도 새로이 정하였다.(윤병석, 1990, 국외한인사회와 민 족운동 , 137쪽) 93)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앞의 책, 3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