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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74 군사연구 제130집 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86) 또한 별개조직으로 각 중대의 관할구역마다 거주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보험대를 조직하였다. 중대장의 지휘를 받는 보험대 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방의 사무를 담당하면서 중국의 관헌과 일제의 동정을 정 탐하고 각 중대 및 소속부대간의 통신 및 안내역할을 하는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유격대와 함께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87) 참의부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은 1920년대 중반기 남북만주의 다른 어느 단체 보다도 활발해 결성된 그해인 1924년 중반부터 25년 말까지 지속적으로 감행된 크고 작은 전투에서 다수의 전과를 올렸다. 당시 국내에서 감행된 독립군작전의 3분의 2 이상이 참의부 독립군에 의해 전개되었을 정도였다. 88) 이는 일제의 국경 수비대의 상부보고에, “동단(참의부)은 타의 여하한 부대보다도 활동목표를 선내 (鮮內)로 하여 침입하고 있으므로 국경방면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의 3분의 2 이상은 동단의 소위(所爲)이다.” 89) 라고 밝히고 있음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참의부는 국내진입작전을 통해 일제 군경의 습격과 일제 통치기관의 파괴․친 일파 숙청․군자금 모금 등 각 방면에 걸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가 운데 1924년 5월 19일 압록강변에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탄 국경 순시선을 선제공격한 사건은 대표적 사례이다. 사이토가 압록강변 일본 국경수비 대를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참의부는 장창헌을 지휘관으로 한 특공대를 조직 하여 사이토가 탄 순시경비정을 기습하였다. 갑작스런 공격에 크게 당황한 순시 선은 속수무책으로 전혀 대항하지 못한 채 혼비백산 도주하였다. 이 작전에서 사 이토를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독립군의 건재를 내외에 알리는 계기 가 되었다. 90) 또한 1925년 3월 평안북도 초산 방면으로 출동하여 3개 부대로 나 뉘어 추동경찰관주재소와 하단동경찰관주재소 및 벽동군 여해 경찰관주재소를 습 격하고, 귀로에 일제 국경수비대와 교전을 펼쳐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1926년 후반부터 참의부의 국내침입투쟁은 내외적 여건 변화 속에서 점차 감소되기에 이른다. 이는 1920년대 후반기 참의부가 북만의 신민부ㆍ남만의 86) 신주백, 앞의 책, 76~77쪽. 87) 위의 책, 97쪽. 8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 48, 278쪽. 8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4, 「昭和 3년 7월 調, 재만선인사상단체분포의 개요 제2」, 759-60쪽. 90) 윤병석, 1990,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 135-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