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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19 주의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주기만 기다 리고 있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남한의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며, 이를 통 해 전쟁을 쉽게 빨리 끝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점은 미군의 참전 여부에 대한 ‘오판’의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부분이 다. 왜냐하면, 박헌영의 말대로 남한 내부에서 광범위한 봉기가 일어날 경우 미 국이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북한의 승리로 빨리 끝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과 김일성은 이 전쟁이 속전속결로 끝나야 한다 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어떠했는가? 전쟁이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는 어떠한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또 다른 ‘오판’이었다. 이미 남한의 공산주 의 조직은 1945년부터 1948년의 기간 동안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붕괴되었다. 1946년의 9월 총파업과 10월 추수폭동, 1948년의 단선단정 반대투쟁과 4.3제주항 쟁, 그리고 여순사건 등으로 대부분의 공산주의 조직들이 적발되었다. 아울러 여 순사건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모든 국가 기관에서 공산 주의자들을 체포하였다. 18) 아울러 전술한 바와 같이 1949년 스탈린과 소련의 지시로 전쟁보다는 남한에 서 게릴라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강동정치학원을 창설하고 여기에서 게릴라들을 남한에 보내 유격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유격투쟁 역시 1949년 말과 1950년 초를 통해 대부분 토벌되었다는 점이다. 박 헌영의 오른팔이자 남조선노동당의 2인자였던 이승엽은 1950년 초 북한에서의 보고를 통해 남한에서 활발하게 유격투쟁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고하였지만, 이 는 잘못된 보고였다. 결국 스탈린에게 제시한 남한의 혁명세력에 대한 박헌영의 주장은 잘못된 주 장이었다. 이것이 남한의 상황에 대한 ‘오판’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입 지를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주장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평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잘못된 주장이 6․25전쟁이 발발하는데 18) 실제로 여순사건으로 인한 군부 내 공산주의자 숙청이 없었을 경우 북한의 남침 직후 한 국군 내에서 한국 정부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경우 전쟁은 빠른 시간 내에 북한의 승리로 끝났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 면 군내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던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실책’ 이었을 수도 있으며, 대한민국에게는 매우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