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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72 군사연구 제130집 의부의 실업장려와 교육사업 등의 자치활동으로 인한 이주 한인사회의 경제적 안정 은 의용군의 군비지원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전과를 올리는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남만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중앙조직과 지방행정조직 나아가 의용군이라는 군 사조직까지 갖추고 출범한 대한통의부는 그 성공적 역할 수행에도 불구하고 출범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주도세력 내부에 분열이 야기되었다. 절대군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전혀 상반된 정치이념적 노선상의 갈등으로 인해 복벽파 전덕원 계 와 공화파 양기탁 계가 대립하게 된 것이다. 79) 이와 더불어 군권을 둘러싼 인선 및 조직상의 이견이 더해져 갈등이 더욱 표면화되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상대편 대원을 살상하는 일이 벌어지자 80) 이후 양파는 완전히 적대관계가 되어 1923년 1월에 홍묘자 방면에서 대규모 유혈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복벽파는 1923년 2월 대한통의부를 탈퇴하고 관전현 일대를 중심으로 대한의군부(의군부) 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의군부는 대한제국의 계승을 천명하는 의미에서 융희 연 호를 사용하는 등 의병의 복벽적 의식을 확고히 하였다. 81) 대한통의부의 분열은 대한의군부의 탈퇴에 이어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통 의부 의용군 간부들의 이탈로 이어졌다. 지속적 총체적 무장투쟁을 위해 통의부 와 의군부 양 세력의 임정 산하로의 통합을 주장한 의용군 지휘부는 자신들의 주 장이 관철되지 않자 1924년 4월 1일 대한통의부 탈퇴를 공식 선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상해 임정의 지휘를 받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만육군참의부(駐滿陸 軍參議府)를 조직하였다. 이에 대한통의부의 세력은 현저히 쇠퇴하고 남만지역에 는 또 다른 통일군단의 조직이 추진되기에 이른다. 82) 79) 전덕원은 1906년 평북 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국권 피탈 이후에는 만주로 이주하여 대한독립단의 간부로 활약한 인물이다. 반면 양기탁은 합병 이전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 을 주도하였고 1920년 말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는 통의부 결성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精 神品行講演團을 조직하여 통의부 관할하의 한인을 대상으로 계몽활동을 전개한 인물이 다. 따라서 양자 간에는 독립운동의 방략이나 이념상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국사편찬 위원회, 한국사 48, 266-67쪽) 80) 1922년 10월 14일 관전현에 있던 양기탁 일행이 전덕원계 병사에 의해 습격을 받아 선전 국장 김창의가 살해되고 양기탁, 현정경 등이 포박 구타를 당한 사건이다.( 독립신문 , 1922년 11월 8일자, 「慘憺한 西間島事變」) 81) 박걸순, 앞의 논문, 231쪽. 8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8, 268-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