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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70 군사연구 제130집 노령, 미주 및 국내에서 참가한 10개 단체 대표 17명의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그 러나 이 회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유회되었고, 남북만주에서 파견 된 재만독립군 대표들도 아무런 소득 없이 실망만 안은 채 만주로 귀환하였다. 70) 북경 군사통일회의를 통해 만주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전 민족적 통일무장세력 을 구축하여 항일전쟁을 펼치려 했던 희망이 무산되자 재만 독립운동단체들은 만 주지역만이라도 통합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남만주의 독립군들은 우선 지역적으로 연결이 가능한 남만주지역만의 통일체 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에 1922년 1월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대한독립단․광한 단․광복군총영 등의 대표들은 남만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이를 통해 같은 해 2월 봉천성 환인현 하구에서 분산 활동하던 각 단체를 통합하여 통합독립군단인 대한 통군부(통군부)를 결성하였다. 71) 그러나 남만의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지역에는 통군부에 가입하지 않은 소규모 독립군부대들이 다수 존재하였으므로 통군부는 1922년 6월 3일 중앙위원회를 개 최하여 잔류 독립군부대들의 재통합을 추진하였다. 이에 같은 해 8월 23일 환인 현 마권자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앞서 통군부에 가입한 서로군정 서․대한독립단․광한단․광복군총영과 새로이 참여한 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 路韓僑民團)․대한광복군영․대한정의군영․대한광복군총영․평안북도독판부 등 의 대표 71명이 모인 가운데 통합군단으로의 대한통의부(통의부)를 결성하였 다. 72) 그리고 통의부는 군대를 의용군으로, 조직을 총장제로 한다는 등의 6개항 을 결의하여 남만의 한인사회에 공표하였다. 73) 대한통의부는 김동삼을 총장, 채상덕을 부총장으로 선출하고 중앙조직으로 민 사․법무․학무․군사부 등을 두었다. 이주한인을 대상으로 한 자치와 항일무장 투쟁을 핵심 활동으로 한 통의부의 자치활동은 중앙에서 총괄하는 각 지역의 지 방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 1,000호를 기준으로 총관(總管)을 책임자로 한 총관사 70) 윤병석, 1990, 독립군사 , 228쪽. 71) 위의 책, 231쪽. 72) 국사편찬위원회, 1968, 한국독립운동사 4, 761~763쪽. 73) 6개항은 첫째, 각 단체 각 기관의 명의를 취소하고 구역 인물 및 제반 처리사항을 무조 건 公決 복종할 것을 서명 날인하고 서약한다. 둘째, 남만한족의 통일기관명을 통의부로 한다. 셋째, 통의부 군대명칭은 의용군으로 한다. 넷째, 제도는 총장제로 한다, 다섯째, 헌장 은 9장 63조를 통과한다. 여섯째 각 부서의 직원은 선거한다. 등이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독립운동사자료집 10, 493-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