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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169 자유시 참변 후 한인 무장부대들은 분산 해체되기에 이른다. 대다수 독립군들 은 재기를 위해 만주로 돌아갔고, 홍범도․이청천 등 일부는 이르쿠츠크로 이동 하여 러시아 적군 제5군단 예하의 1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한편 박일리아파에 가담했던 독립군은 연해주로 가서 한인의용군사회(韓人義勇軍士會)를 조직하였 다. 68) 국내 진입작전과 봉오동전투 및 청산리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경신참변 과 자유시참변 등을 겪으며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은 크나큰 침체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외적인 요인 못지않게 내적인 요인도 한계로 작용하였다. 이는 우선 독립군이 통일된 연합전선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3․1운동 직후 만주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독립군단체는 통합군단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고립분산적으로 활동하였고 나아가 대중적 기반을 확고히 마련하지 못하였다. 독립군들은 만주의 한인사회로부터 인적자원과 군자 금 등 절대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았으나 한인사회의 요구와 이해를 전제로 대중 자체를 항일의 동력으로 끌어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독립군부대의 항일투쟁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역량을 효과적으로 집중시키는 원동력이 부족하였다. 이 점은 초기 무장투쟁의 한계로 이후 만주의 한인 민족해 방운동이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였다. 69) 독립군단체들은 항일독립투쟁을 위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들은 지역 별로 분산된 채 활동해서는 효과적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보다 효율적인 항전기지 수립과 통일된 군사조직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그 리고 이 같은 인식은 국내외 민족운동가 공통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이 결과 1921년 4월 북경에서 박용만․신숙 등의 주재로 군사통일회의가 개최되어 만주, 에는 만주지역 독립군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출병 후 연해주 각지에서 결성되었던 한인무 장단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곳의 무장단체들 중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지를 받 는 吳夏黙을 중심으로 한 高麗革命軍政議會와 이에 반대하는 사할린의용대의 박일리아파 간에 군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에 오하묵의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이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적군의 지원을 받아 박일리아파를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 당한 수의 독립군이 죽거나 체포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시사변이다. 피해상황에 대해 고려혁명군정의회측은 사망 36명․행방불명 59명․포로 864명으로, 간 도 반일단체들은 참변성토문에서 사망 272명․익사 31명․행방불명 250여 명․포로 917 명으로 밝히고 있다.(윤병석, 1987, 재발굴 독립운동사 , 한국일보사, 257쪽; 국사편찬위 원회, 한국사 , 48, 248~255쪽) 68) 한길사, 한국사 16, 249-50쪽. 69) 위의 책, 250-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