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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68 군사연구 제130집 Ⅳ. 독립군부대의 통합운동과 삼부의 형성 1. 독립군부대의 재편과 대한통의부의 결성 청산리전쟁에서의 대승 직후 독립군부대들은 일본군의 공격과 보복으로 인한 교포사회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개별부대들의 통합을 통한 효과적인 투쟁을 위해 새로운 근거지로의 장정을 추진하였다. 이에 1920년 12월에 이르러 일단 소만 국 경지대인 중국령 밀산으로 이동 집결하였다. 이곳에서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 혼춘한민회․대한의민단․군무도독부․대한의군부․신민단 등 독립군 개별부대는 약 3,500여 명의 대규모 병력의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되었다. 65) 그러나 밀산은 간도에 비해 한인사회의 제반 여건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곳이므로 대규모 병력을 장기간 수용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에 독립군 지도자들은 독립군의 전력 보강과 새로운 항일전의 준비를 위해 20만에 이르는 대규모 한인사회가 형 성되어 있던 러시아 연해주로의 이동을 결정하였다. 여기에는 노령지역 한인 무 장단체와의 연합을 통한 독립전쟁 추진의도와 함께 당시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정 부의 피압박 약소민족 해방투쟁에 대한 후원을 기대한 면도 작용하였다. 66) 새로이 단일편제로 통합 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은 밀산에서 연해주 이만(現 달네 레첸스크)을 거쳐 노령 자유시(현 스보보드니, 구 알렉셔프스크)로 이동 집결하였 다. 그러나 1921년 6월 이곳에서 벌어진 자유시사변으로 인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거점 마련과 독립군 통합군단에 의한 항일독립투쟁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한국독립운동사상 가장 비극적 사건으로 기록된 이 참변은 당시 연해주지방의 정 세와 독립군 내부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빚어진 결과물이었다. 러시아 극동공화 국 및 볼셰비키의 한인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간섭과 이를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크 츠크파 공산당 사이의 대립 그리고 이와 연관된 한인무장세력 간의 군통수권을 둘러싼 충돌 등 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폭발한 사건이었다. 67) 65) 대한독립군단은 1개 여단은 3개 대대, 1개 대대는 3개 중대, 1개 중대는 27명을 1개 소대 로 하는 3개 소대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총사령에 김규식, 여단장에 지청천이 선임되었다.(윤병석, 1990, 독립군사 , 210-11쪽) 66) 윤병석, 위의 책, 208~211쪽. 67) 자유시사변의 직접적 충돌은 러시아적군 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가 한인부대인 사할 린의용대(尼港부대)의 무장해제를 위해 전면 공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자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