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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66 군사연구 제130집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째 국경 인접지역을 근거지로 삼는 것이 국내진입작전수행을 위해 유리하다 는 점, 둘째 백두산록 일대는 험준한 지세(地勢)에다 산림이 우거져 일본군과의 교전시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 셋째 이곳은 봉천성과 길림성의 접 경지역이므로 중국군의 탄압을 피할 수 있는 적합한 지역이라는 점, 넷째 백두산 록의 화룡현 2도구의 어랑촌․3도구의 청산리 등지는 한인들이 일찍부터 정착하 면서 촌락을 형성하고 있어 독립군부대들이 인적 물적 지원을 최소한이나마 받을 수 있는 지역이라는 점 등이었다. 60) 1920년 10월 20일경 독립군부대가 백두산록의 화룡현 이도구․삼도구 일대에 집결하자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토벌군의 일부인 동지대(東支隊) 병력 5,000여 명 을 동원해 토벌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독립군연합부대는 같은 달 21일에 삼도 구 청산리의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26일까지 6일간에 걸쳐 완루구․천수평․어 랑촌․맹개골․만기구․천보산․고동하곡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소 10여 차례의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61) 청산리전쟁은 이 일대에서 6일간 10여 회에 걸쳐 치러 진 독립군이 거둔 승첩을 통칭하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연대장, 대대장을 포함 1,250여 명을 사살하고, 기관총과 소총․탄약 등 많은 전리품을 획 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반해 독립군부대의 희생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 자 220여 명을 냈을 뿐이다. 62) 독립군은 무기와 병력면에서 절대적 우세에 있던 일본군을 상대로 빛나는 전과를 올리며 대승을 거두었다. 독립군이 이처럼 대승을 거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 을까. 우선 직접적 요인으로는 정신적 측면에서 독립군의 죽음을 불사한 결사항전의 60) 김봉렬, 2005, 앞의 논문, 163~165쪽. 61) 최초의 전투는 3도구 방면에서 포진하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일군 동지대 소속 의 야마다(山田)대좌가 지휘하는 야마다연대간에 10월 21일 오전 8시경부터 벌어진 백운 평전투였다. 이어 22일에는 홍범도 지휘의 독립군연합부대가 이도구에서 펼친 완루구전 투와 북로군정서의 천수평전투 및 청산리대첩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어랑촌전투가 있었 다. 연이어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곡전투가 이어졌다.(신용하, 2003, 일제강점기 한국민족사 , 420-36쪽) 62)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의 전과와 피해는 자료마다 서로 다르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 부가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전사자가 연대장 1명과 대대장 2명 등 1,257명이며, 부 상자는 장교포함 200여 명이라고 하였다. 또한 독립군이 노획한 전리품으로 기관총 4정, 소총 53정, 기병총 31정, 탄약 5,000여 발 등이 있다.( 독립신문 1921년 2월 25일자, 1월 21일자, 신용하, 2003, 위의 책, 437-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