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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165 반면 막강 화력을 보유한 정규군을 투입하고도 예상치 못한 참패를 당한 일 제는 독립군의 정예화된 전력을 실감하고 이를 방치할 경우 식민통치에 큰 위 협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독립군 초토화를 위한 근본적 대책을 강구하 기에 이른다. 55) 일제는 자신들이 조작한 혼춘사건(渾春事件)을 56) 빌미로 1920년 10월 일본군의 간도출병(間島出兵)을 단행하고, 독립군과 그 기반인 한인사회를 초토화시키기 위해 경신참변(간도참변)을 57) 자행하였다. 독립군 무장투쟁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둔 청산리전쟁은 이 과정에서 빚어진 항일독립전쟁이었다. 일본군은 만주지역의 독립군 토벌을 위해 나남 주둔 제19사단․용산 주둔 제 20사단․블라디보스토크 주둔 제14사단․관동군 등 총 20,000여 명의 대규모 병력을 편성하고 간도지역으로의 진출을 기도하였다. 58) 그러나 독립군은 일본 군의 간도침입 작전을 예상하고 미리 대비하였다. 독립군은 자신들의 근거지에 서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펼칠 경우 군영의 타격은 물론 간도 한인사 회의 희생도 매우 클 것임을 심히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 대한국민군 등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근거지 구축을 위해 1920년 8월 하순부터 각기 백두산 서쪽 험준한 밀림지대로의 이동을 단행하였다. 59) 이는 전략적으로 5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8권, 220쪽. 56) 1920년 10월 2일 발생한 혼춘사건은 같은 해 8월 작성된 소위 ‘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 劃’에 의거 첫단계로 조작된 사건이다. 일제는 중국마적 長江好를 매수하여 혼춘의 민가 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케 하였다. 이에 중국군 70여 명과 한인 7명이 살해당하는 참 화를 입었고, 일인 경찰 일가와 일인부녀자 9명이 살해되었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간도 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다.(강덕상, 현대사자료 28, 146-48쪽) 57) 혼춘사건을 빌미로 1920년 10월초 서북간도로 출병한 일군은 독립군토벌작전과 병행하여 독립군의 기반인 한인사회에 대한 초토화를 자행하였다. 이들은 간도 각지에서 한인촌락 을 습격하여 한인 양민을 대량 학살하거나 부녀자를 강간하고, 가옥․학교․교회 등을 무차별 방화하였다. 이같은 만행은 1920년 10월부터 일군이 간도에서 퇴각하는 다음해 5 월까지 계속되었다. 경신참변 당시 한인사회가 입은 인적, 물적 피해의 규모와 실상을 명 확히 밝히기는 자료상의 한계로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임정 간도파견원이 1920년 1 0~11월 두 달간의 피해로 제시한 인명피해 3,469명, 체포 170여 명, 민가 3,209개동 학교 36개교, 교회당 14개소, 곡물 54,045섬 소실 등에서 그 정도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독립신문 , 1920년 12월 18일자, 「西北間島同胞의 慘狀血報」) 58) 당시 동원된 일군 병력은 제19사단 9,000명, 제20사단 700명, 제14사단 4,000명, 제11사단 과 제12사단 각 1,000명, 관동군 1,200명 등 도합 20,0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였다.(국사 편찬위원회, 한국사 48, 222쪽) 59) 이때 이동 집결하여 청산리전투에 참여한 독립군 병력을 종합해보면, 북로군정서 600명, 대한독립군 300명, 대한국민군 250명, 대한의군부 150명, 신민단 200명, 대한광복단 200명, 대한의민단 100명, 혼춘한민회 200명 등 총 2,000여 명에 이른다.(윤병석, 1990, 독립군사 , 179쪽; 신용하 앞의 책, 4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