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page

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64 군사연구 제130집 두만강 건너 함북 종성군 강양동으로 잠입하여 일군헌병 순찰소대를 기습 격파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습격을 당한 일본군은 보복을 위해 남양수비대 신미이 랑(新美二郞) 중위가 인솔하는 중대병력으로 두만강 건너 중국 영토를 불법 침입 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6월 6일 추격해 오는 일군을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전투 에서 재차 섬멸하기에 이른다. 51) 독립군의 연이은 국내 침공작전에 의해 타격을 입은 일제는 함북 나남 주둔 제19사단의 야스카와(安川) 소좌가 지휘하는 월강추 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고, 두만강 건너 화룡현 봉오동 일대의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공격하였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7일 일군 월경추격대대가 독립 군 근거지 봉오동을 공격하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안무의 국민회군․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등의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유인 기습하여 궤멸시킨 승첩이다. 52)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을 부상케 하는 전과를 거두 었다. 53) 봉오동전투의 대승은 독립군에게는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게 하는 본 격적인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임시정부 군무부가 봉오동전투를 ‘독립전쟁 의 제1회전’이라고 선언하였음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전투로 항일독립전 쟁에서 승리의 가능성을 확신한 독립군은 지속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독 립군단 간의 통합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병력과 군비 확충에 박차를 가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강요에 의해 독립군 토벌에 가담했던 중국군과 타협할 수 있는 가 능성을 여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54) 51)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는 도문시 남쪽 10여 리 지점에 위치한 두만강변의 작은 국경마을 로 그 대안에는 동북쪽으로 종성군의 강양동이 위치하고 있다. 강양동 패전의 보복으로 독립군 추격에 나선 일군경은 삼둔자에 이르러 분풀이로 무고한 양민을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독립군은 삼둔자 서방 요지에서 이들을 기습 섬멸시켜 버렸다. 이 전투는 처음으로 중국영토로 불법 침입한 일본군을 최초로 격퇴한 전투이다.(신용하, 2003, 앞의 책, 202쪽) 52) 봉오동전투의 발단은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의 박승길부대원 30여 명의 두만강 건너 함북 종성군 강양동 일군헌병 순찰소대를 기습 격파한 전투와 이를 추격한 일군 남양수 비대 신미중위 인솔의 중대병력을 패퇴시킨 삼둔자전투로 발단되었다.(신용하, 2003, 위의 책, 202쪽; 윤병석,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 52~53쪽) 53) 봉오동전투의 전과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많은 차이를 보여 그 실상을 명확히 확인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승첩 직후에 보도된 독립신문이나 중국 상해시보의 기사를 통해서 볼 때 일본군 150여 명을 사살한 공전의 대승을 거둔 것응 사실로 확인된다.(윤병석, 위 의 책, 58쪽) 54) 김봉렬, 2005, 앞의 논문, 150~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