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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163 을 극복해야만 하였다. 일제는 독립군의 활동이 거세질수록 국경지역의 경계태세 와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당시 일제는 국내에 보통 부군(府郡) 단위로 1개 경 찰서를 두고 있었으나 국경에 인접한 함남, 함북, 평북의 3개 도에는 경찰관서를 증설하고 병력을 대거 투입하였다. 47) 또한 독립군의 활동무대가 타국 영토인 이 상 현지 정부의 정책과 관헌의 입장에 따라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 었다. 특히 동삼성 군벌 장작림의 탄압에서 보이듯 일제에 동조하거나 일제의 강 압으로 독립군의 수색 토벌에 가담할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수행에 커 다란 장애가 되었다. 48) 이와 함께 독립군의 무장을 위해 시베리아 등지에서 확보한 무기를 운반하는 것 또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무기구입을 위한 군자금 마련도 쉽지 않은 것이지만 구입한 무기를 비밀리 운반하는 것 역시 더 큰 어려움이었다. 49) 삼엄한 경계망을 피해 서북간도 등지의 독립군부대까지 운반하는 것 자체가 국내 진입작 전 못지않은 죽음을 무릅쓴 또 다른 형태의 전투였다. 따라서 전과의 다소에 상 관없이 재만 독립군 결성에 의한 국내 진입작전은 만주 한인사회의 오랜 염원이 었던 본토 수복을 위한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 그리고 지속적, 성공적으 로 수행되었다는 점에서 항일무장투쟁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 다. 50) 한인 독립군부대들의 활동은 국내 진공작전에서 끝나지 않았다. 독립군의 연이 은 국내 침공작전으로 타격을 입은 일제는 본격적으로 독립군부대의 진압에 나섰 다. 일제는 1920년 6월 초 두만강 건너 중국 영토인 간도에까지 불법 침입하며 독립군을 색출 진압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정규군과 맞서 우리의 독립군들은 그 전투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때 벌어진 전투 에서 승리한 대표적 쾌거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쟁이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4일 새벽 대한신민단 박승길 소대 병력 30여 명이 47) 일제는 함북 11개 군에 경찰서 19개․파출소 6개․주재소 130개․출장소 42개를, 함남에 는 16개 군에 경찰서 20개․파출소 6개․주재소 180개․출장소 12개를, 평북에는 19개 군에 경찰서 24개․파출소 5개․주재소 195개․출장소 84개를 설치하였다.(국사편찬위원 회, 1988, 한민족독립운동사 4, 60쪽) 48)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엮음, 앞의 책, 108-09쪽. 49) 윤병석, 1990, 國外 韓人社會와 民族運動 , 48~49쪽. 50) 김봉렬, 2005, 「1920년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추이」, 가라문화 18집, 143-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