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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62 군사연구 제130집 열정과 투지에도 불구하고 무장력과 군비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무기와 전투능력을 갖추고 지속적으로 활동한 무장단체들은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일정정도 재정적 뒷받침이 이루어질 수 있던 일부 단체들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42) 국내의 3․1운동을 계기로 만주 각지의 한인독립운동단체들은 오랜 숙원이었 던 독립전쟁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최초 국내진입작전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 립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 일제의 국경수비망을 뚫고 잠 입하여 압록강변 혜산진의 일군 국경수비대를 습격하였다. 이어 10월에는 평북 강계의 만포진을 점령하고 자성군으로 진출하여 3일간의 교전에서 일군 70여 명 을 살상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43) 다음 해인 1920년에는 대한독립군을 비롯해 최진동․안무․김좌진 등이 지휘 하는 독립군 등이 수시로 국내진입작전을 펼쳤다. 이는 이 해 1월부터 3월까지 독립군이 수행한 국내진입작전이 총 24회에 달하고 있다는 일제 측 기록이나 44) , 3월부터 6월 초까지 전후 32차례의 유격전과 34곳의 일제관공서를 습격했다는 임 정 군무부의 공식 발표를 통해서도 그 정도를 엿볼 수 있다. 45) 이 가운데 3월 15 일 200여 명의 독립군이 두만강 건너 온성군 유포면 풍리동 주재소를 공격하며 시작된 온성전투는 10여 일간이나 지속적으로 펼쳐진 치열한 전투였다. 특히 미 산헌병감시소를 기습하여 50여 분간의 교전 끝에 일군경을 섬멸시킨 18일 새벽의 전투는 독립군의 조직적 전투력을 일제에 유감없이 과시한 쾌거였다. 46) 1919년 여름부터 다음해 봄까지 수시로 펼친 국내 진공작전에서 독립군부대들 은 일본군 국경수비대와 함경도, 평안도 일대의 일제 통치기구를 습격 파괴하는 등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작전수행을 위해서는 전투 못지않은 어려움 영단 등이, 서간도지역에는 광한단․대한독립의용단․대한독립청년연합회․광복군사령 부․광복군총영․천마산대․보합단․의성단 등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노령지역에도 대한 독립군결사대․대한신민단․대한독립군 등이 조직되었다. 42) 신용하, 2001, 일제강점기민족사(상) , 357-59쪽. 43) 신용하, 위의 책, 366-67쪽. 44) 姜德相編, 現代史資料 27, 647-48쪽. 윤병석 1990, 독립군사 131쪽. 45) 독립신문 88호, 1920년 12월 25일자, 「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46) 이날 새벽 5시 30분 두만강을 건너 온성군의 장덕동과 월성동, 풍교동을 분산 공격한 독 립군은 미산 헌병감시소 전방 고지 성벽을 점거하고 미산헌병대의 일군경과 50분간 교전 을 펼쳐 이들을 섬멸시켰다.(윤병석, 1990, 독립군사 , 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