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page

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161 명칭을 바꾸어 서로군정서로 정식 결성되었다. 서로군정서는 민정담당의 정무청 과 군사담당의 군정청을 설치하고, 군정청에 독립군 사령부를 두어 사령관 지청 천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 36) 그리고 같은 해 5월 신흥학교(신흥중학)에서 이름을 바꾼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본격적으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신흥무 관학교는 2년제 고등군사반 과정을 편성하는 한편 초등군사반을 두어 3개월 내지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통해 1919년 11월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 다. 37) 그리고 이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에 편성되어 국내 진입작전을 비롯해 이 후 독립전쟁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38) 다음으로 유하현 삼원보에서 결성된 대한독립단을 들 수 있다. 국내에서 의병 항쟁을 주도하다 이 지역으로 옮겨와 보약사․향약계․농무계 등을 조직하여 활 동하던 박장호․조맹선․백삼규․전덕원 등은 이들 단체를 통합 개편하여 1919년 4월 무장독립군단인 대한독립단을 설립하였다. 대한독립단은 국내 각지와 서간도 일대에 지단(支團)과 지부를 두고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집해 1919년 8월을 즈음 해서는 병력 1,500여 명의 대부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압록강 대안의 국내로 잠 입해 일제군경과 수차례 교전을 벌였다. 39)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1919년 말 연호 사용을 계기로 복벽주의와 공화주의의 이념적 갈등을 겪으며 기원독립단과 민국 독립단으로 양분되었다. 이후 민국독립단은 대한청년단연합회․평북독판부 등과 함께 광복군총영을 결성하였으며, 복벽주의계열인 기원독립단은 원래의 대한독립 단을 유지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40) 이외에도 동북만주 지역에는 1920년을 즈음하여 무려 40∼50여 개에 이르는 독립군단체가 활동하였다. 41) 그러나 이들 독립운동 단체들은 투쟁에 대한 강한 36) 서로군정서는 최고책임자인 督辦에 이상룡․부독판 여준․정무청장 이탁․참모부장 김동 삼․사령관 지청천 등으로 간부진을 구성하였다.(박환, 앞의 책, 33~39쪽) 37) 박환, 위의 책, 49쪽. 38) 서로군정서 의용대는 삼수군 영성주재소 습격(1919.5), 강계군 삼강주재소 습격(1919.7), 강계군 문옥면 면사무소 습격(1919.7), 후창군 친일파군수 처단(1919.7) 등을 비롯해 강계, 자성, 벽동, 위원, 삭주 등지의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였다.(신용하, 1985, 앞의 책, 119 쪽; 신용하, 2001,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사(상) 384쪽). 3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 48, 208~209쪽. 40) 김승학, 1965, 한국독립운동사 , 370-71쪽. 41) 북간도지역에는 대한의군부(의군부)․대한정의군정사․한민회군․조선독립군․의단․대한 독립군비단․대한광복단(광복단)․대한의민단(의민단)․흥업단․대한신민단(신민단)․광 정단․야단․혼한군무부․국민의사부․대진단․백산무사단․혈성단․태극단․노농회․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