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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60 군사연구 제130집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1920년 5월 연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로 통 합 조직되었다. 이들 부대와 함께 북간도 최강의 항일독립군단으로 1919년 대한군정서(북로군 정서)가 조직되었다. 대한군정서는 서일․채오․양현 등 대종교 핵심인사들이 북 간도로 망명하여 1911년 3월 왕청현에서 조직한 중광단을 모체로 설립된 독립군 부대이다.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전쟁을 표방한 중광단은 만주 일대의 대종교도 와 의병 및 공교회(孔敎會) 등을 규합하여 1919년 4월 대한정의단(정의단)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대한정의단 산하 독립군 무장단체로 1919년 8월 대한군정회가 조직되고, 이어 같은 해 10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대한군정부는 같은 해 12월 상해 임시정부 산하 독립군부대 인 대한군정서로 조직되었다. 33) 이 대한군정서를 보통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구 분하여 북로군정서라 부르게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총재 서일․총사령관 김좌 진․연성대장 이범석 등을 중심으로 본영인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근거지를 두 고 병영과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다. 34) 이들은 1,200여 명의 대병력으로 러시아 에서 대량의 무기를 구입하여 타 독립군 부대보다 월등한 무장력을 갖추었다. 35) 서간도지역의 대표적 항일무장단체로는 우선 서로군정서를 들 수 있다. 통화 현․유하현 일대를 중심으로 한인사회의 자치와 독립군기지 건설을 다져오던 부 민단은 3․1운동 발발을 계기로 1919년 3월 자신계(自新契)․교육회 등과 통합하 여 이름을 한족회로 바꾸고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한족회는 같은 해 4월 총재 이상룡․부총재 여준․참모장 이탁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군정부를 조 직하였다. 그리고 군정부는 1919년 11월 임시정부 산하 독립군부대로 편제되면서 50정, 수류탄 20여 개와 기관총 2문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국가보훈처, 앞의 책, 68 쪽) 한편 강덕상편, 현대사자료 에 의하면 대한국민군은 1920년 5~6월경에 병력 약 500 명, 군총 약 400정, 권총 약 150정, 약간의 수류탄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강덕상편, 1970, 현대사자료 , 27, 356쪽) 33) 신용하, 2003, 의병과 독립군의 무장독립운동 , 지식산업사, 240-47쪽. 34) 대한군정서의 사관연성소는 1920년 2월 왕청현 서대파 상촌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대한군 정서 사령관 김좌진이 연성소장, 학교부장 나중소, 학도단장에 박영희, 교관에 이범석이 활동 하였다. 1920년 9월 300여 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신용하, 위의 책, 265~270쪽) 35) 북로군정서는 일제 측 자료에 의하면 1920년 8월 현재 병력 1,200여 명, 소총 1200정, 탄 약 24만 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발, 기관총 7문 등 막강한 무장력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난다.(국가보훈처, 1997, 앞의 책, 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