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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58 군사연구 제130집 가 되었다. 3․1운동으로 민족적 저항의 잠재력이 폭발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종 결로 국제정세도 유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준비한 투쟁역량을 발휘 할 때가 다가왔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이에 더해 당시 만주지역의 다 음과 같은 두 가지 현상은 1920년대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하 였다. 첫째 1910년대 초부터 지속적으로 양성한 한인자치기구의 독립군 단체가 1910 년대 말에 이르러 한 단계 높은 근대적 무장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 당시 러시아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간의 대립의 와중에서 해산된 연해주지 역의 러시아부대와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귀국을 기다리고 있던 체코 군대 등으 로부터 반출된 다수의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군부대의 무장력을 한층 높일 수 있 었다. 24) 무장을 위한 자금은 1910년대 한인사회 자치기구와 이주 한인의 노력으 로 이들의 생활터전이 자리잡혀갔음에 연유한다. 특히 이주 한인들의 경제력을 향상시킨 주요인은 만주지역에서의 벼농사의 성공적인 개발이었다. 25) 이와 함께 1차 세계대전 중 만주지역 특히, 동만지역에서의 유럽으로의 다량의 잡곡 수출 로 인한 한인사회의 경제력 향상 또한 독립운동 군자금을 마련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26) 둘째로는 3․1운동을 전후하여 독립군의 인적자원이 한층 풍부해졌다는 점이 다. 이는 3․1운동 직후 해외에서의 민족운동을 위해 수많은 우국 청장년층이 만 주로 건너왔다는 것과 함께 만주지역에서의 벼농사의 개발로 1910년대 후반부터 한인이주민이 급증했다는 사실이다. 27)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월경한 청장년층은 물론 경제적 이유로 이주한 한인 농민들 또한 병농일치의 투쟁을 기본방략으로 하는 우리 독립운동단체에게는 모두 잠재적 자원이었다. 따라서 이주 한인의 양 24) 위의 책, 241-42. 25) 이주 한인들은 버려둔 습지를 임대하여 논으로 개발해 대량의 쌀을 생산하였다. 水田 농 경기술의 보급과 벼농사의 경제적 이윤이 보장됨에 따라 1910년대 후반부터는 만주지역 내륙 깊숙한 곳에서도 水田耕作이 가능해져 한인들의 경제력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되었 다. 그리고 수전농사가 가능해짐에 따라 재만한인의 거주지역도 만주 전역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신주백, 앞의 책, 31쪽) 26) 한길사, 한국사 16, 241-42쪽. 27) 1919년 한 해 동안 만주로 이주한 한인의 숫자는 무려 44,3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는 1910년대 전반기 연평균 한인 이주민의 숫자보다 서너 배나 많은 인원이었다.(신주백, 앞 의 책, 28쪽의 표 1-1-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