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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56 군사연구 제130집 4월 대고산의 노천회의(露天會議)에서 민단(民團) 성격의 한인사회 자치단체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경학사는 한인의 이주와 정착 및 경제력 향상을 꾀 함과 동시에 민족교육과 군사교육의 실시를 통해 만주지역 한인들을 결집시킴은 물론 독립운동 인재 양성을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1911년 신흥강습소를 설립하 였으며 서간도 각지에 노동강습소를 개설함으로써 병농일치제에 입각한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였다. 신흥강습소는 1913년 5월 신흥학교(신흥중학)로 개명하였으 며, 교직원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같은 해 3월 신흥학우단 18) 을 조직하였다. 19) 경학사는 삼원보에서 남쪽으로 90여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근거지 를 옮겨 1914년 부민단(扶民團)으로 재조직되었다. 부민단은 전체 한인사회를 좀 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본부조직과 지방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또 한 신흥학우단과 함께 신흥학교와 각 분교․지교(支校)에 설치한 노동강습소 등에 서 양성한 인재를 근간으로 1914년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건설하고 독립군을 편성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백서농장은 백두산 서쪽기슭 사방 200리의 고원지대 평야 에 위치한 병농일치의 독립군 집단이었다. 농장이란 명칭은 중국 당국의 이목을 의식해 붙여진 명칭일 뿐 내부적으로는 ‘우리군영’으로 불렸음에서 알 수 있듯이 독립군 군영이었다. 처음 입영자는 380여 명으로 신흥학교 1회부터 4회 졸업생들 이 주축이었고 3․1운동 당시까지 이곳에서 수천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20) 간도지역의 독립운동기지와 함께 이 시기 대표적 해외 독립운동기지로 러시아 령 연해주 지역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에는 1905년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자치단 체인 한민회가 설립된 것을 시발로 1907년 대한청년학우회, 1910년 13도의군(13 道義軍)과 성명회, 1911년 권업회,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 등 한인운동단체들이 결성되어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21) 그러나 본고의 대상이 만주지역의 독립투쟁 18) 유하현 삼원보 大花斜에 근거지를 둔 신흥학우단의 처음 명칭은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 을 가진 다물(多勿)을 따 다물단이라고 하였으나 곧 신흥학우단으로 개칭하였다. 단원들 은 서간도 지방은 물론 남북만주를 비롯한 국내외 독립운동에서 핵심 인물로 활약하였 다. 기관지로 新興學友報 를 발간하고, 소학교를 설립하여 아동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노동강습소와 노동학교도 운영하였다.(윤병석, 1990,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 40~41 쪽; 蔡根植, 1985, 武裝獨立運動秘史 , 民族文化社, 53~54쪽) 19) 신용하, 1985, 앞의 책, 109~119쪽. 20) 윤병석,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 42~43쪽; 윤병석, 1990, 독립군사 94~96쪽; 朴 烜, 1991, 滿洲韓人民族運動史硏究 , 一潮閣. 341쪽. 21) 윤병석, 1990,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 199~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