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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155 다음으로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추진된 곳은 북만주 소만국경의 밀산부 지역을 들 수 있다. 밀산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 이후 블 라디보스토크로 간 이상설과 그곳 한민회장 김학만․ 해조신문 주간 정순만․유 학자․이승희 및 윤일병 등을 중심으로 1909년 여름부터 추진되었다. 이들은 러 시아와 중국의 국경에 자리잡은 흥개호(항카호) 북쪽의 중국령 밀산부 봉밀산 일 대를 후보지로 선정하여 한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고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 수하였다. 이 중 특히, 이승희는 전후 4년여 동안 이곳에 거처하며 이곳 마을을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의미로 한흥동(韓興洞)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한민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운동기지 건설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또한 동국 사략 을 지어 한인학생들에게 우리민족의 역사를 가르쳤고, 「민약」(民約)을 제정 하여 한인사회의 단결을 꾀하였다. 한편 이상설 등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그곳 민족운동가들과 힘을 모아 마련한 자금으로 한흥동의 경영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수시로 한흥동을 왕래하였 다. 15) 또한 1910년대 초 이갑 등 신민회 회원들에 의해 밀산현 봉밀산자에 밀산 무관학교도 설립되었다. 16) 서간도 지역에도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었다. 이 지역은 신민회 간부들의 주도 로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된 가장 대표적 지역이었다. 일제강점 이후 국내에 잔류 하고 있던 신민회 간부들은 1910년 12월 양기탁․안태국․주진수․이승훈․김 구․이동녕 등을 중심으로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열고,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을 위한 계획적 집단이주를 결정하였다. 17) 특히, 1911년 1월 안악사건과 9월의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로 날조된 105인사건으로 회원 600여 명이 구금되는 등 국 내에서의 민족운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게 되자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들은 봉천성․유하현․삼원보 추가가 지역을 독립운동근거지로 선정하고 1910년 겨울 이회영․이시영 6형제와 이상룡․이동녕 등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다수의 한인들을 집단 이주시켜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1911년 15) 윤병석, 1990,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 16~17쪽. 16) 신용하, 1985,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19-21쪽. 17) 회의 내용은 국내에는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통감을 두어 비밀리에 국민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것, 국외에서는 서간도 통화현 부근의 토지를 매입하여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벌일 것 등이었다.(신용하, 1985, 앞의 책, 109~1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