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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54 군사연구 제130집 이와 함께 한인사회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1909년 간도협약 체결 직후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들은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 교민자 치단체인 간민자치회(한민자치회)를 조직하였다. 간민자치회는 일본의 항의를 받 은 청국 관헌 지시로 해산되고 1910년 3월 한인자제 교육을 목적으로 한 간민교 육회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간민교육회는 일반교육을 위한 기구가 아니라 간민자 치회보다도 더 강력한 자치활동을 수행한 독립운동추진기구였다. 간민교육회는 북간도 각지에 지회를 두어 한인사회를 조직화하고 교민들에게 교육비를 징수하 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결과 북간도 한인사회에는 국내의 촌락보다도 더 많은 수의 학교가 설립되 었을 뿐만 아니라 신지식 신문화 또한 높은 수준으로 보급할 수 있었다. 명동학 교를 비롯 은진․명신․광성․창동․북일학교 등은 당시 이 지역의 대표적 학교 들이었다. 그리고 한인이 1,000여 호 이상 거주하고 있던 왕청현 라자구 대전자에 는 이동휘․이종호․김하석 등이 동림무관학교(대전학교)를 11)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였다. 또한 야학(夜學)을 열어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고 농촌에 식 산회(殖産會)를 조직하여 생산조합․판매조합 등을 운영함으로써 지역민의 경제 기반을 활성화하려 하였다. 12) 간민교육회는 한인자치와 조국독립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13 년 2월 간민회로 개편되었다. 간민회는 정부조직을 갖추고 북간도 한인사회의 실 질적 자치를 담당하는 기구로 존재하였다. 이에 중국 관헌조차도 이 지역 한인사 회의 행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간민회와 협의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13) 이 간민 회는 1919년 11월 다시 대한국민회로 재결성되면서 독립군 부대인 국민회군을 편 성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담당하였다. 간민회 이외에도 북간도에서의 활 동이 주목되는 항일독립운동단체로 청년친목회와 대동협신회 및 기독교우회 등을 들 수 있다. 14) 11) 이 학교는 나자구 대전자에 위치했기 때문에 대전무관학교라고도 한다. 동림무관학교는 개교 1년 후인 1914년에 재정궁핍과 만주군벌의 압력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러시 아령으로 이동을 시도하였다.(신용하, 2001, 일제강점기 민족사 상 140쪽; 1985, 「신민 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19~121쪽) 12) 윤병석, 1990,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 29쪽. 13) 김봉렬, 2004, 앞의 논문, 145-46쪽. 14) 위의 논문, 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