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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153 아혁명의 물결과 1911년 신해혁명을 전후한 중국의 사상조류가 이 지역까지 파급 되었다는 점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최적지가 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7) 한편 만주로 이주한 민족운동가들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추진과 때맞춰 국내 에서 활동하던 항일비밀결사 조직들의 지원도 기지건설을 위해 큰 힘이 되었다. 1915년을 전후하여 결성된 대한광복회․조선국권회복단․조선국민회 등의 비밀결 사단체들은 국외독립운동기지에서의 독립군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집과 국내 청년 의 국외독립운동기지에로의 이주를 추진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그리고 이들 단체 인사들은 3․1운동 이후에는 직접 해외로 이주하여 독립군 활동에도 투신하 였다. 8) 해외 이주 민족운동가들이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최초로 개척한 곳은 북간도 지역이었다. 이미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상실을 절감한 이상설․이동녕․정순 만․여준 등은 1906년 4월경부터 북간도의 연길현 용정촌을 독립운동기지로 설정 하고 경영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연길현 용 정촌에 정착한 후 그 해 8월 민족교육을 위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서전서숙은 이름만으론 교육기관이지만 실상은 독립군양성소와 다름이 없었다. 9) 이 학교는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1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서전서숙이 폐교되자 곧이어 김약연․김학연․정재면․박정서(무림) 등 이 1908년 화룡현 장재촌(長財村)의 ‘명동촌’이라는 한인마을에 명동서숙(명동학 교)를 설립하여 북간도 한인자제들을 위한 민족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또한 이동휘를 비롯한 신민회계열 인사들도 기독교선교 활동을 통한 항일독립운 동을 위해 이 시기를 전후해 각지에 교회와 함께 민족교육기관으로 보창학교(普 昌學校)를 설립하였다. 아울러 대종교 창시자 나철(나인영)을 비롯 서일․박찬익 등 대종교도들도 화룡현 삼도구 청파호와 풍락동 등지에 실업학교를 세워 민족교 육에 힘썼다. 또한 오상근․오병묵․김종만 등도 연길현 와룡동에 있던 기독교 창동소학교에다 남녀공학의 중학교를 증설하였다. 이들 학교는 이후 항일독립운 동 기지건설을 위한 인재양성기관으로 자리잡아갔다. 10) 7) 윤병석, 1990,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 일조각, 8~9쪽. 8) 김봉렬, 2004, 「해외 한인사회의 항일독립운동기지 건설」, 가라문화 18집, 140-41쪽. 9) 윤병석, 1990,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 15쪽. 10) 김봉렬, 2004, 앞의 논문, 143-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