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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재만 항일무장투쟁의 추이와 의미(Ⅰ) 152 군사연구 제130집 의 봉금령(封禁令) 해제를 전후로 경제적으로 몰락한 많은 한인들이 간도지역으 로 이주한데 3) 이어, 한일합병 이후 일제의 경제적 억압과 토지 상실로 인한 유망 민의 급증으로 4) 일찍부터 한인 교포사회가 형성됨으로써 독립운동기지로 적합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다. 5) 의병계열은 1909년 9월부터 2개월에 걸친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국내에서의 즉각적 결전보다는 국외에서의 장기적인 무장투쟁을 모색하게 되었다. 애국계몽계열 또한 이전까지의 국내에서의 계몽자강운동에 더 하여 국외에서의 무장투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즉, 의병계열은 점진적 장기적 형 태로의 무장독립투쟁을, 애국계몽계열은 군사력 양성을 통한 근대적 독립전쟁으 로 투쟁방법을 전환하려 했던 것이다. 6) 이에 일찍부터 한인 교포사회가 형성된 지역인 동시에 지리적으로 압록강이나 두만강만 건너면 곧바로 국내진입이 가능 한 간도지역이 새로운 독립운동을 위한 가장 적합한 곳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 고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고대로부터 우리민족의 고토(故土)라는 인식이 강한 지 역으로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상징적 의미도 함께 갖는 지역이었다. 또 한 1905년을 전후해 시베리아지방까지 확산된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제1차 러시 하여 편의상 동변도지방과 남만의 북부지방의 둘로 나누어 볼 수 있고, 우리가 흔히 말하 는 서간도는 동변도지방의 일부라 할 수 있다.(신주백, 1999,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 사(1920~1945) , 아세아문화사, 11, 24쪽 참조) 3) 만주는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후 대대로 봉금의 성지로서 漢人이나 韓人의 이주를 금지 해 왔다. 그것은 청나라 황실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청나라 권력의 골간은 만주족 군사력인 팔기이므로 청 황실은 무력을 연마하기 위한 수렵장을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농경민족인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이 지역을 농지화하고 만주족을 농민화하는 현상 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동만과 남만지방에 이주하여 농사를 짓는 한인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자 더 이상 억제하지 못하고 1875년에 봉금정책을 해제하였다. 뿐만 아 니라 길림성은 1885년에 越墾局을 설치해 한국이주민에 의한 농지개간을 장려하게 되었 다. 이 결과 한인 거주자가 급증하게 되었다.(국사편찬위원회, 1999, 한국사 43, 509쪽) 4) 1910년 일제병탄 직후인 2~3년간 및 1919년을 전후한 시기에 한인의 만주 이주가 급증하 였다. 이는 국내 정치상황의 급변과 함께 만주지역에서의 水田경작이 큰 요인이었다. 수전 경작으로 인해 1910년대 후반부터는 평안도, 함경도 등 북부지역 사람만이 아니라 영호남 지역의 사람들도 북만지방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급증하였다.(신주백, 앞의 책, 27-33쪽) 5) 동만지방의 한인 현황을 보면 1900년에는 한인 109,500 중국인 33,500, 1912년에는 한인 116,300 중국인 49,000, 1916년에는 한인 203,426 중국인 60,896, 1921년에는 한인 307,806, 중국인 73,748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리고 전체 거주자 중 한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80% 내외 로 압도적으로 많았다.(만주국군정부고문부, 만주공산비의 연구 1, 1937, 543쪽; 신주백 위의 책 29쪽에서 재인용) 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3, 327-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