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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투와 미군의 전투효율성 140 군사연구 제130집 령군으로 아주 안락한 생활을 영유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가정에 일본 인 하인을 2~3명씩 두고 있었으며, 주말마다 연회가 지속되었고 21) , 병사들은 편 하게 지내면서 GI 법의 혜택을 고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전투 준비보 다는 점령군으로 준비하면서 경찰과 같은 역할 및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1949년 중반 워커 장군이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신임 사령관은 제8군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전투 준비태세를 갖추기 위한 훈련에 두고 점령군으로서의 임무를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리하여 제8군 전 체의 4개 사단이 모두 각개전투 훈련부터 다시 시작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 7월부터 시작된 훈련은 우선 전투경험이 전무한 신임병들의 전투력 향상에 목적 으로 두고 9월에 완료하며, 연말까지 중대급 훈련과 평가를 마친 뒤 1950년 전반 기에는 대대급 훈련과 평가를 완료하는 계획이었다. 연대급 훈련은 1950년 후반 기에 계획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8군 예하의 사단들은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대 대급 훈련을 마쳤거나 마무리 수준에 있었으며, 연대급 훈련은 시작하지 못한 상 태였다. 22) 제24사단의 경우 제34연대가 훈련 수준이 가장 미흡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1950년에 워커 장군은 연대장을 해임하고 러블레스 대령을 새롭게 연대장으로 임 명하였다. 이러한 상태의 사단과 연대들 중에서 제34연대가 대전을 방어하게 된 것이다. 전투 경험이 전무한 병사들이 대부분인 제34연대는 초기부터 심각한 문 제점을 나타냈다. 연대장과 예하 지휘관들이 전장 공포나 퇴로 차단에 대한 병적 인 두려움, 싸우기보다는 후퇴하려는 경향의 제34연대를 전환시키려고 노력하였 지만 짧은 기간에 이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 주둔하면서 제대로 된 훈련, 특히 실전과 같이 실제 탄약을 사용하면서 포탄의 폭음 속에서 훈련을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부사관들과 장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 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제24사단 병사들의 전의를 고취시키려고 진두지휘를 하면서 솔선수범을 보여주었지만 부대 병사들의 공격정신은 쉽게 나타나지 21) 전쟁이 발발하기 하루 전인 6월 24일 밤에도 딘 소장은 부인과 같이 한복으로 치장하고 사단의 간부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Dean, General Dean's Story, pp.12~13. 22) Roy K. Flint, Task Force Smith and the 24the Division: Delay and Withdrawal, 5-19 July 1950, in Charles Heller & William Stofft, ed. America's First Battles, 1776-1965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86), pp.269~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