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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투와 미군의 전투효율성 136 군사연구 제130집 다.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마틴 대령은 결국 이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진두지휘하 다가 천안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마틴 대령의 후임은 당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7사단 제32연대장이던 미 육사 출신의 보샘프(Charles E. Beauchamp) 대령이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당 시 대부분의 연대장이 40대 후반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42세의 젊은 연대장으 로 열성적이고 긍정적인 장교였다. 보샘프 대령은 대전 전투에서 실질적인 지휘 관이었다. 그 역시 전임자인 마틴 대령과 같이 두 가지의 임무를 달성하려고 진 두지휘를 하면서 적극적으로 노력하였지만 제34연대를 싸우는 전투부대로 전환시 키지는 못하였다. 또한 그 역시 북한군뿐만 아니라 아군의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 지 못하여 결정적인 철수 시점을 놓치고 말았다. 전체적으로 사단장과 연대장들의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물론 철수 시점 을 잘못 파악하여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지휘관들의 잘못이지만 당시의 전황을 고려한다면 다른 지휘관이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제34연대의 경우에 는 짧은 기간에 너무 자주 지휘관이 교체되는 불운까지 겹쳤다. 약 2주의 기간에 세 명의 지휘관을 경험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물론 전시 상황이기는 하지 만 지휘관이 부대를 파악하고 영향력을 발휘하여 부대를 변화시키기에는 너무 짧 은 기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34연대는 다른 연대와 달리 가장 전투력이 떨어 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죽미령에서 대전에 이르는 동안 제24사단의 장교 손실이 높았던 것은 북한군 의 우회 및 퇴로 차단 전술에도 기인하지만 더 큰 이유는 바로 병사들이 전투를 두려워하며 후퇴만 하려하는 경향을 변화시키기 위해 지휘관들이 진두에서 지휘 하였기 때문이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훈련도 제대로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전투부대보다는 점령지에 주둔하던 식민지 군대의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뒤의 훈련 부분에서 추가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3. 정 보 정보의 측면에서 대전을 방어하던 제24사단은 눈 뜬 장님이었다. 죽미령 이후 의 계속되는 전투로 북한군의 전술을 파악은 하였지만 대전에서는 이에 대한 대 책을 정확하게 준비하지 못하였다. 특히, 북한군의 우회 및 퇴로 차단 방법은 잘 알려졌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책을 명확하게 강구하여야 했지만 그러하지 못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