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page

대전 전투와 미군의 전투효율성 134 군사연구 제130집 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이 참전하자 큐슈의 제24사단이 제일 먼저 참전하여 북 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는 임무를 부여 받자 딘 소장은 사단장 겸 주한 미 지상군 사령관으로 전쟁을 지휘하였다. 이후 제8군사령부가 설치되자 제24사단장의 역할 만 수행하였다. 최초 죽미령에서부터 대전에 이르기까지 딘 소장은 어느 일정 선 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제일 먼저 선정된 곳이 평택-안성 선 이었고, 이것이 붕괴되자 금강선에서 재차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금강 방어선이 붕괴되고 대전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딘 소장이 최초에 판단 하기로 대전은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오랫동안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 겨서 하루 동안만 지연전을 펼치다 후퇴할 계획이었다. 이와 같은 지휘결심을 볼 때 딘 소장은 참전 이후 적절하게 부대를 운용하여 임무를 달성하려고 노력했으며, 그의 판단이 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전후에 실토하였듯이 “나무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숲을 보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다. 17) 실제로 그는 사단의 지휘권한을 후방의 부사단장과 대전의 제34연대장에게 일임하고 중요한 순간에 전차사냥에 나서는 결정적인 실 수를 범하였다. 딘 소장이 이러한 행위를 한 것은 계속해서 후퇴하려는 부대원들 의 전의와 사기를 고양하고, 대한민국 국민과 군대에 신뢰감을 주면서, 도대체 북 한군이 어떻게 싸우는지 직접 보려고 대전에 남아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 였다. 18) 그러나 오히려 후방 지휘소에서 지휘를 하거나 대전에서도 연대 지휘소 에서 전체 전황을 파악하며 적절한 지시를 하였다면 제24사단의 피해는 그리 크 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추가적인 비판이 존재한다. 먼저, 사단 수색 중대를 제34연대 에 배속하여 금산 가도에서 철수함으로써 북한군의 남쪽 기동에 대해 전혀 대책 을 세우지 못한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딘 소장의 의도와 정반대로 나타난 전형적 인 ‘마찰’의 결과이다. 딘 소장은 수색중대를 제34연대에 배속함으로써 연대장이 더욱 정확한 정보를 신속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수색중대를 배속 시켰지만 명령 처리과정의 실수로 금산 지역에서 철수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북한 군 제4사단 제18연대가 노출되지 않고 미군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비판은 좀 더 이른 시간에 철수하지 않고 20일 오후 늦게 철수 명령을 17)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145. 18)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