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page

대전 전투와 미군의 전투효율성 128 군사연구 제130집 불가능함을 깨닫고 야간을 이용하여 철수할 것을 연대장에게 건의했으나 연대장 은 여전히 현진지의 고수를 지시하였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보샘프 대령은 자신의 연대가 대전에서 2일간 방어하는 것 못지않게 연대 전체의 전의(戰意)와 사기를 고양하여 싸우는 부대로 바꾸는 것 역시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자신이 현장에서 지휘하며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9) 그러나 그날 밤 에 전차의 굉음소리를 내며 진지를 통과하자 대대장 아이레스(Red Ayres) 중령 은 다시 한 번 대대의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연대장은 여전히 다음 날까지 대전 방어가 가능하다고 믿고 이러한 건의를 묵살하였다. 북한군은 20일 새벽 3시에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34연대 제1대대는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공격하는 북한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기 시작하 였다. 이미 전차에 의해 퇴로가 차단당했을 것을 우려한 대대장은 동쪽이 아닌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연대장이 정확한 상황을 파악한 것은 날이 밝은 후 였다. 비행장 부근의 제3대대에서 2개 중대로 반격을 지시하였으나 이들의 진격 은 북한군의 공격으로 허사가 되었고, 간신히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한편 남쪽의 제19연대 제2대대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대대장은 통신 두절로 인 해 예하 중대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대의 상황을 연 대지휘소에 보고할 수도 없었다. 결국 대대는 철수하는 제34연대 1대대와 더불어 남쪽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대전을 방어하기 위한 병력은 제34연대 3 대대와 혼성포병대대가 전부였으며, 사단장과 대대장은 정확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단장은 20일 오전 중에 처음으로 실전 배치된 3.5인치 로켓포로 전차 사냥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전 시내에 적 전차가 출현하였 다는 사실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단장은 연대장에게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철수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오후 늦게 철수를 시작한 제34연대는 대전 시가지 전투보다 더욱 큰 시련을 겪었다. 이미 곳곳에 퇴로를 차단한 적뿐만 아니라 시내를 통해 공격해오는 적들 과 교전을 하면서 철수해야만 되었다. 결국 철수를 완료한 사단은 사단장이 실종 되고 투입된 3,933명 중 1,150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대부분의 장비를 상실하였다. 9)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 America in Korea, 1950~1953(Doubleday; New York, 1987), p.133. Beauchamp 대령은 당시 대부분의 연대장들보다 나이가 적은 42세 의 적극적인 장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