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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전투와 미군의 전투효율성 124 군사연구 제130집 실한 것이다. 4) 이로 인해 연대는 휴식과 재편성을 위해 영동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21연대(연대장 Richard Stephens 대령)는 죽미령과 전의-조치원 전투 에서 타격을 입고 1,400여 명의 손실로 1,100여 명만 보유하고 옥천에서 재편성 중이었다. 5) 그나마 제34연대가 유일하게 전투부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34연대도 평택-안성과 천안, 그리고 공주 지역에서의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피 해도 심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피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한 연대장들 이 전사나 부상으로 약 2주의 기간 동안 3명이나 임명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연대도 최상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대전 전투에 임한 것은 아니었다. 딘 소장이 대전에서 오랫동안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한다는 것은 이미 결정되 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주와 대평리 전투 이후 사단의 6개 보병대대 중에 겨우 3개 대대만 투입이 가능한 상태에서 북한군 제3, 4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의 공격을 장시간 버틴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거 기에 국군 수도사단과 대치하고 있는 북한군 제2사단까지 추가적으로 투입된다면 이는 거의 절망적인 결과가 명확하였다. 그리하여 7월 18일부터 대전 방어에 들 어간 딘 소장은 다음 날인 19일에 대전에서 철수할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 나 워커 중장의 요청으로 20일에 철수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으며, 이것이 미 제 24사단에게 재앙을 가져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북한군은 경부가도를 중심으로 배치된 미군을 격파 하였으며, 중부 및 중동부 전선에서도 커다란 어려움 없이 진격하고 있었다. 이들 앞에 놓인 대전은 전략적으로 북한군에게 대단히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대전은 당시 13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대한민국의 4대 도시였으며 교통의 요충지로 대전 에서 대구, 금산, 또는 광주 방향으로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의 차후 작 전을 위해 빠른 시간 내에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미군의 주력인 제24사 단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짐을 의미 하기도 하였다. 4)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Washington, D.C.; U.S. GPO, 1960), p.144. 5) T. R. Fehrenbach, This Kind of War; The Classic Korean War History(Washington, D.C.; Brassey's, 1998), p.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