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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의 원인에 대한 재고찰 14 군사연구 제130집 차이가 있지만, 전쟁의 여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미국의 개입 여부가 중요하게 고 려되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소련은 전쟁보다는 게릴라전을 통 해 남한 자체에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을 1949년을 통해 북한 정부에 대해 꾸준히 권고하였다. 11) 한편 대화록의 뒷부분은 전쟁의 발발과정에 대한 스탈린의 권고 내용을 담고 있 다. 남한 측이 먼저 도발을 한 이후에 이에 대한 공세가 있어야 한다는 점, 38선 상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옹진 지역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은 1949년의 계획 으로부터 크게 다른 것은 아니지만, 이제 전면전을 일으켜야 한다는 김일성의 계획 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1949년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스탈린은 ‘친절하게도’ 평화통일 제안을 통해 이를 남한이 거절한 직후에 ‘거사’를 실행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대화의 말미에서 박헌영은 남한에 20만의 게릴라들이 있기 때문에 이 전 쟁은 빨리 끝날 것이라는 주장을 덧붙였다. 즉,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의 곳곳에 있 는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 동조하여 봉기를 일으킬 것이며, 이는 전쟁 국면에서 북 한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12) 이상과 같은 1950년 봄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 사이의 대화는 더 이상 논쟁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전쟁의 기원에 대해 명백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1949년 봄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의 대화를 함께 고 려한다면, 김일성은 이미 1949년 초부터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스 탈린의 반대에 의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1950년 봄 스탈린이 이를 허가하자 곧 전쟁을 일으켰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스탈린의 입장 변화는 1949년에 있었던 소련의 핵개발과 중국의 공산 혁명이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13) 11) 양영조, 2010〈6․25전쟁의 배경과 국내외 대응: 북한의 무력통일론과 북중소 관계를 중 심으로〉, 2010년 11월 외교통상부 한국전쟁 60주년 학술대회 미출간 발표문 참조. 12)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2인자였던 이승엽은 1950년 1월 남한에서 유격대의 투쟁이 남한 사람 들의 지지를 받으며 계속되고 있다고 발언하고 있다. 이승엽,〈조국통일을 위한 남반부 인민 유격투쟁〉, 김남식 편, 1974《남로당연구 자료집 제1집》,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505~514쪽. 이러한 인식이 박헌영과 이승엽에 의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남한으로부터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었거나 이들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기 위한 정치적 목 적이 깔려 있는 발언이었다고 판단된다. 13) 여기에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했다는 사실 역시 스탈린의 입장 변화의 중요한 요인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