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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111 만약 상륙이 이루어진다면 그곳이 어디가 될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예측을 할 수 없었다. 둘째, 인천상륙이 이루어진 이후 김일성과 북한군 지도부는 인천상륙의 심각성 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낙동강선에서 또 한 번의 공세를 취하기 위한 욕심 때문에 낙동강선에서 일부 전투 사단들을 서울로 북상하게 해 서울 서측방 방어를 강화 하는 대신, 최용건의 서해안 사령부가 경인지역 주변의 예비 연대 및 여단만으로 서울방어에 임하게 했다. 스탈린은 9월 18일 김일성에서 낙동강선에서 ‘4개 사단’ 을 북상하게 해 서울서측 방어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전선사령관 김책과 그의 참모장 김웅의 반대에 직면에 극히 적은 병력만을 서울로 전용했다. 김일성 은 또한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주력의 철수를 즉각 시행하지 않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함으로써 그가 뒤늦게 철수명령을 내릴 무렵에는 이미 미 제8군이 낙동강 방 어선을 돌파함으로써 부대들이 조직적 철수를 시행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과 북한군 지도부는 전략적 작전지도의 미숙성으로 인해 북 한군 주력이 UN군의 인천상륙으로 인해 포위망에 빠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중 국과 소련의 일부 지도자들은 북한군이 8, 9월 공세에서 실패하자 주력의 철수를 통해 후방의 강화를 조언했으나 김일성과 북한군 수뇌부는 ‘최후공세에 의한 전 한반도 점령’의 희망적 사고를 버리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이 시행된 이후에도 그들은 후방에 대한 위협에 신속히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북한군 주력이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제어 : 인천상륙, 김일성, 스탈린, 한국전쟁, 북한군, 인민군, 소련 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