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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110 군사연구 제130집 (국문초록) 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 김 광 수 - 한국전쟁 중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의 흐름을 바꾼 일대 사건으로 많 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맥아더가 적을 기만하고 작전계획에 대한 기도 비닉을 달성함으로써 완벽한 기습을 달성했다는 점이 이 작전의 주된 성공 요인 으로서 지적되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북한이 사전에 이를 사전에 예측하였는지에 대해 서는 북한 자료를 검토하기까지는 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박명림은 처음으로 인 천지역에 주둔했던 북한군의 작전문서를 UN측 노획문서군에서 찾아내 검토함으 로써 북한군은 인천이 상륙지점이 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고 이에 대비하는 조 치들을 취했기 때문에 “인천상륙은 결코 기습이 아니었다”고 단언하며, 바로 이 러한 이유로 인천에 상륙한 UN군이 서울을 점령하기까지 13일이나 걸린 것이라 고 설명했다. 이 논문은 인천상륙을 전후한 시기의 북한측 사료와 구 소련 자료들을 종합적 으로 검토함으로써 과연 북한은 인천상륙작전 이전에 이 작전에 대해 얼마나 정 확히 예측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인천에 UN군이 상륙한 이후 북한은 어떠한 방 식으로 새로운 사태에 대해 대응하고자 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인천상륙을 전후한 북한의 대응을 면밀히 재구성한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북한은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부터 그들의 점령지 배 후로 UN군이 상륙해 올 가능성에 대비해 해안 방어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으 며, 그 중에서 인천은 주요 상륙 예상지점으로 고려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 은 인천이 반드시 상륙지점일 것이라는 정보를 갖지 못했고 인천을 비롯한 전 해 안지역에 대한 방어대책을 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 후공세’라고 부른 9월 공세를 시행하면서 후방 방어보다는 모든 전력을 낙동강전 선에 투입했다. 9월 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김일성은 후방의 반상륙대책 강화보다는 또 한 번의 공세를 준비하는데 좀 더 신경을 썼다. 상륙 며칠 전 목 포, 군산 지역에 UN군의 양동이 시행되었을 때 앞으로 상륙작전이 있을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