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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109 알 수 있다. 훈련 부족, 전반적인 사기 저하와 함께 취약한 화력을 가진 부대들로 부터 전투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왜 소련은 좀 더 일찍이 북한에게 신편 사단을 편성할 장비들을 보 내지 않았는가? 북한 사람들은 이 당시에 소련측이 신편 사단들을 무장할 무기들 을 보내지 않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불평했다. 소련측으로서 이점에 있어서 는 약간의 변명할 여지가 있었다. 그들은 9월 23일에 평양에 보낼 Yak-9 항공기 들의 운송방법을 고려했고, 10월 초에는 6개 사단을 장비할 무기 일체를 만주를 경유해 수송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113) 그러나 급속한 UN군의 북진과 북한군의 붕괴로 인해 그 무기들이 적의 손에 들어갈 것을 염려해 전량 공급을 하지 않았 던 것으로 보인다. 궁금한 것은 왜 좀 더 일찍 무기 공급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점이다. 그것은 첫째, 북한 사람들이 사전에 충분한 무기를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 일 것이다. 김일성은 소련이 북한이 요청한 모든 무기를 제공했다고 인식하고 있 었지만, 그는 소련은 지원한 무기에 대해서는 항상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그는 새로운 무기구매 요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소련은 북한 조종사의 능력을 불신해 제트전투기 공급을 생 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개전 초에 미국의 제트전투기에 Yak-9 전투기(프로 펠러기)가 상대가 될 수 없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과 바실례프 스키는 인천상륙작전 후에 북한에 또 다른 프로펠러 전투기인 La-9의 추가 공급 을 통해 평양 상공을 엄호할 방안을 고려했다. 그것으로는 미 공군의 활동을 어 느 정도 곤란케 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소책이 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제트 전투기를 공급해도 이를 조종할만한 조종사가 없었던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원고접수일 : 2010.11.4, 심사완료일 : 2010.11.25, 게재확정일 : 2010.11.30) 113) 「소련 육군상이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보낸 보고서. 평양의 엄호를 위해 제32전투비 행사단 예하 제304전투비행대대를 파견하는 조치에 대하여, 1950년 9월 23일」, 국사편찬 위원회 편,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53년 , 112~113쪽; 「소련군 총참모부 작전총 국의 정보조사서, 1950년 10월 15일까지 (6개 보병사단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우선적으로 공급해야할 무기들과 1950년 10월 21일 공급된 기본 무기 종류 목록」(날짜 불 명, 그러나 10월 11일 수령 직인이 있음),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53년 , 185~ 1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