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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108 군사연구 제130집 에게 나누어줄 소총도 부족하게 되었고, 병사들은 식량부족으로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던 상황을 그들은 도외시했다. 그들은 곧 남한에서 추수가 이루어져 ‘만기현 물세’를 징수한다면 식량문제가 호전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포탄과 유류, 배터리 등 다른 보급품들은 현지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물품이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지도부의 작전 지도는 최고사령관으로서 김일성의 군 사적 무능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무엇보다도 낙동강에서 주력부대의 철수 시 기를 놓치지 않았으면 서울의 장기방어도 가능했을 것이며, 적어도 1950년 9월 말에서 10월 사이에 북한군이 당했던 것과 같은 파멸적 패배는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8월 말에 북한군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공세를 계 속하고자 하는 김일성을 고무한 점에 있어서는 큰 잘못을 범했지만, 인천상륙 이 후 낙동강선의 주력사단들을 빼내 서울방어를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후방으로 지연전을 시행하면서 군의 보존을 꾀하라는 9월 18일에 내린 ‘4개 사단’ 북상 명 령은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인천의 위기에 대해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고, 예하 부대들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는 스탈린의 지시에 대해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해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모호한 명령을 내렸고, 현지 부대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한 김책, 김웅은 그 명령을 자의 로 해석해 최소한의 병력만을 북상시켰다. 아마도 그들 역시 이때까지도 ‘부산 점 령’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군이 영등포와 노량진을 점령한 9월 21 일 이전까지는 적어도 서울-김천간의 통신이나 연락은 가능했으나 그 후로는 그 마저도 차단되었다. 전선의 전황에 대해 무신경하게 대응하고, 또한 적시에 명령 을 내리지 못함으로써 낙동강 전선의 14개 주력 사단을 포위망 안에 빠뜨렸다. 그 파국의 책임은 김일성과 김책, 그리고 김웅에게 있었다. 서울 점령과 낙동강 전선 붕괴 이후 38선 이북에 남아 있던 북한군의 무기력 한 패배는 그동안 후방에서 많은 수의 예비연대만을 창설하는 데만 몰두한 나머 지, 이들을 숫자는 작지만 좀 더 능력 있는 부대로 육성하지 못한 것에서도 기인 한다. 많은 부대들을 창설하느라 간부의 부족이 더욱 심각해졌고, 그나마 부족한 수량의 화포와 장비가 많은 부대들에게 분산 분배됨으로써 각 부대들이 갖고 있 는 전투력은 모든 부대에서 보잘 것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김일성이 9월 말에 여러 번 되뇐 ‘남한에서 9개 사단 편성, 북한에서 6개 사단 편성’은 그가 얼 마나 이런 문제들을 도외시한 채 사단 수, 부대 수만을 늘리는데 집착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