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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106 군사연구 제130집 북한의 저작들이 훗날 그의 행적을 미화한 것과는 달리 김일성이 최고사령부 의 참모요원들을 이끌고 덕천으로 갔을 때 그는 최고사령관으로서 예하 부대를 지휘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가 덕천의 한 터널 안에 숨긴 한량의 객차에 머 물렀던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북한군 부대와의 모든 통신은 끊겨 있었다. 107) 무전기를 휴대하지 않고 사령부를 옮겼기 때문이다. 북한은 후에 5일 동안 김일 성이 머무른 이 지역을 ‘옥천사적지’라고 명명하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작전도 우에 붉은 화살표를 그려 가시며 적후에 2전선에서 싸우게 될 사단들과 련합부대 들을 편성하시고 그의 활동구역과 투쟁형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시였으며 제2전 선사령관과 정치위원들을 임명하시고 그들을 전선으로 파견하시였다”고 하며 활 발한 지휘 활동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108)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김일성 과 동행했던 소련대사 슈티코프에 의하면 그는 신변의 안전에 위험을 느끼고, 안 색은 초췌해져 우수에 젖어 넋이 나간 상태였고, 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이나 해야 하겠다는 말을 슈티코프에게 했다. 109) 부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5일간 계속되었다. 110) 그가 평양과 연락이 두절된 채로 덕천에 있을 동안 평양에서는 10월 19일과 20 일 양일 동안 급히 방어선에 배치된 북한군 부대들이 크게 저항하지 못한 채 국 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의 수중에 떨어졌다. 중국군이 참전하던 무렵 김일성과 덕천에 함께 있다가 팽덕회와의 면담을 위 해 김일성과 함께 평북 대동으로 이동해 간 슈티코프가 10월 20일 소련군 총참모 부에 북한군의 상태에 대해서 한 보고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인민군의 마지막 부대와 기관이 평양을 떠났다. 적에 대한 저항도 더 이상 없을 것 107) Zhurnal, 1950년 10월 15~20일자. 108)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시기의 혁명사적지 (평양: 금성청년출판사, 1981), 4~12쪽. 109) 슈티코프의 가브릴 코로트코프와의 면담, 코로트코프, 스탈린과 김일성 제2권, 76~78쪽. 110) 김일성이 옥천에서 10월 20일 평북 대유동으로 옮긴 다음에야 서북 지역의 3개 사단의 상황이 파악되었을 뿐이다. 슈티코프로부터의 보고를 기초로 작성된 슈테멘코의 스탈린 에 대한 10월 20자 일일 상황보고를 통해 볼 때, 김일성은 10월 15~20일 사이에 지도 상에서 원산 북쪽 산악지대로부터 소련까지의 국경에 이르는 해안지대 방어와 산악 지 형을 이용해 장진호, 갑산 지역으로의 입구를 봉쇄하겠다는 구상을 한 것 같으나, 그는 동해안에 어떤 부대들이 어떠한 상태로 있는지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소련군 총참모장이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보낸 보고서. 1950년 10월 20일 8시 00분 현재 조 선에서의 전투 활동에 대하여, No. 284133, 1950년 10월 20일 13시 30분」, 한국전쟁, 문 서와 자료, 1950~1953년 , 181~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