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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105 마지막 피 한 방울을 흘릴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호소했고, 노동자에게는 무기 생산을, 농민에게는 식량 공급을, 적 후방의 빨치산들에게는 더 적극적인 후방교 란과 파괴를 주문했다. 또한 인민들에게 “후방에 있는 간첩분자 및 파괴분자들을 제때에 적발하여 체포 소탕”하고, “각종 요언 유포자, 우울분자, 낙심분자, 도피분 자, 비겁분자들과 타협 없는 투쟁을 전개”할 것을 요구했다. 103) 연설은 격정에 넘 쳐 있었으나 효과는 없었다. 전선의 진지는 단 몇 차례의 포격에도 붕괴되고, 후 방의 인민들은 UN군의 진격해오는 도로에 나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했다. 1950년 10월 13일에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이 무렵 패배 의 분위기가 이미 평양을 엄습하고 있었다. 평양에서는 상점, 식당 그리고 기타 판매점들은 일부 개인 가게들을 제외하고 문을 닫았다. 이미 3일전부터 피난민들 이 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각의 핵심 인원과 김일성, 박헌영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정부 관료들은 강계로 후퇴해갔다. 일부 민주당과 청우당 ‘반동’들이 미 국과 이승만 정권의 진입을 목표로 하여 비밀리에 파괴활동을 하고 있었다. 주민 들뿐만 아니라 정부 내에서도 당혹감과 비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군관들은 소 련고문관들에게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조언이 아니라 실질적인 원조라고 말 하며 소련고문들의 권고를 무시했다. 김일(金一)조차 군사고문들에게 “우리가 필 요한 것은 고문들이나 그들의 조언이 아닌 실질적인 지원이다”고 거칠게 말했 다. 104) 10월 14일과 15일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군에 명령을 내려 후퇴하는 자에 대한 즉결처분과 독전대를 운영하여 방어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05) 그러 나 후방으로 분산 후퇴하는 병력들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106) 김일성과 슈티코프는 10월 14일 금천이 함락된 다음날인 10월 15일 더 이상 평양방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최고사령부를 덕천의 옥천역 부근 터널로 옮 기기로 하였다. 김일성은 이날 소수의 최고사령부 참모들을 이끌고 덕천으로 피 신했다. 박헌영은 소련대사관을 따라 신의주로 떠났다. 103) 「1950년 10월 11일 방송하신 김일성장군의 연설」(1950년 10월 11일), 조선중앙통신사, 조선중앙년감: 1951~1952 , 21~23쪽. 104) TsAMO RF, Fond 5, Opis 918795, Delo 124, Ll. 124, 136~140. 105) NARA, RG 242, Shipping Advice 2012,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0070호」(1950년 10월 14일);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박헌영, 「지령: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0070 호 집행을 위한 사업조직에 대하여」(1950년 10월 15일, 평양시). 106) Zhurnal, 1950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