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page

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104 군사연구 제130집 미만인 것으로 보이며, 서울방어 당시에 비해서도 전력은 극히 미약한 것이었다. 전 전선에 대한 방어대책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부대들은 한․미군의 38선 북 진작전에 깨지기 쉬운 유리잔처럼 붕괴되었다. 수많은 신편 사단들은 첫 전투에 진지를 포기하고 흩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00) 동해안에서는 동해로부터의 미 해군의 함포사격과 미 해군의 지원항공기의 막강한 화력지원을 받는 국군 제3사 단, 수도사단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10월 10~12일에 원산을 점령당했다. 서부전선에서 북한군이 가장 중점을 두어 방어를 시행해보고자 한 곳은 금천 과 그 남방의 산악지대였다. 평양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 제1기병사단은 10월 8일부터 진격을 시작하여 금천 남방에 진출했을 때 대단히 거센 저항을 받 았다. 이곳에는 김창봉 소장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19사단과 제27교육여단이 방어 하고 있었다. 금천 남쪽 고지대와 금천 시가에서 북한군 사단들은 1개 독립전차 연대까지 투입하여 10월 14일까지 완강한 방어를 시행했지만 전차부대는 하루 동 안의 전투에서 소유한 전차를 모두 상실하고, 보병들은 임진강 서쪽의 백천으로 우회하여 금천의 배후인 한포리 교량을 점령한 미 제7기병연대에게 퇴로를 차단 당해 포위되었다. 포위당한 부대들이 포로가 되거나 분산해서 흩어졌다. 10월 12 일 원산 상실, 10월 14일 금천 상실 이후 북한군은 더 이상 평양을 방어할 유력 한 부대를 찾을 수 없었다. 해주에 주둔한 오진우 소장의 제43사단은 10월 16일 사리원 방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이보다 먼저 사리원을 선점한 미 제1기병 사단과 해주, 재령의 양 방향으로 진출하는 미 제24사단 병력에 차단되어 대부분 의 병력이 투항했다. 101) 금천과 원산이 공격을 받고 있던 시점인 10월 10일 김일성은 대국민 방송연설을 통해 저항의지를 고취해보고자 하였다. 102) 10월 11일 김일성은 스탈린이 1942년 7월 독일군의 공격에 맞서 전체 국민에게 저항을 촉구했던 연설을 연상하는 「조국 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라는 주제의 방송연설을 했다. 북한군 장병들에게는 100) 이 당시 제30민청사단의 전투상황을 기술한 다음의 기록은 그 실상을 잘 보여준다. 장 학봉,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 416~424쪽. 101)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pp.622~631; 제43사단 박창일 소좌 포로진술, FEC, ADVATIS FWD RPT #1042 (24 October 1950); 제43사단 손영관 상위 포로진술 EUSAK, 164-MISDI-1156; 제43사단 이억주 대위 포로진술 FEC, ADVATIS FWD RPT #0191(29 October 1950). 102) 코로트코프, 스탈린과 김일성 제2권, 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