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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103 보유한 무기도 편제에 비해서 형편없이 부족했고, 지휘할 군관들도 부족한 상태 였다. 10월 1일부터 5일까지 38선으로 철수한 북한군은 38선에서는 세 방향의 주 요 접근로에 방어 병력이 배치되었다; (1) 개성-금천 방면: 제19사단, 제27교육여 단(사단으로 승격), (2) 철원 방면: 제25교육여단(사단으로 승격), 제26교육여단, 제31사단(철원), 제32사단(평강), 제33독립연대, 제18사단 잔여부대, (3) 춘천 방면: 제92예비연대(화천)와 제1, 제3, 제8, 제9, 제12, 제15사단의 패잔부대. 또한 항구 지역을 중심으로 신편 사단들이 편성되어 배치되었다; (1) 해주: 제43사단과 제41 독립땅크연대, (2) 원산: 제42사단, 제45독립땅크연대, 제24해군육전연대, 제96예비 연대, (3) 진남포: 제46사단, (4) 나남: 제41사단, (5) 청진: “청진여단”, (6) 신의주: 제47사단. 서해안에는 해주에서 남포까지의 해안에 제25해군육전여단이 배치되었 다. 그러나 강릉에서는 국군 제3사단이 10월 1일 이미 38선을 돌파해 급속히 북 상해왔다. 이 접근로에는 제24해군육전여단의 1개 대대가 국군의 진격을 차단할 임무를 맡았다. 97) 평양 방어를 위해서는 3선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평양 시가지, 그리고 그 외곽 5~6Km 반경, 그리고 그 외곽 20Km 반경에 고지대와 도로 접근로를 연결하는 3중 의 원형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평양 방어를 담당할 부대는 민족보위성 경비 연대, 내무성 경비연대, 각종 군관학교 군관후보생들밖에 없었다. 98) 평양 방어에 임했던 군관 포로들에게 의하면 평양에는 이 부대들을 묶어 ‘평양경위여단’(또는 ‘평양 위수여단’)이 편성되었는데, 6개의 소총대대, 1개의 포병대대, 1개의 독립탱크중대, 6개의 박격포중대가 전체 전력이었다. 평양 외곽방어를 위해서 10월 8일에는 전차 20대와 자주포로 4개의 탱크중대, 2개의 자주포중대로 구성된 ‘평양방어땅크연대’ 를 편성해, 제1선의 흑교리와 제2선의 중화에 배치했다. 99) 전체 병력은 1만 명 97) 부대의 배치에 관해서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하여 교차 대조했다. Zhurnal, 1950년 10월 1~15일자; Voina v Koree 1950~1953, pp.136~141; US Far East Command,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typescript, 1952), pp.52~83. 북한이 10월초에 새롭게 편성한 제41-43, 45-47사단 중 제45사단은 함흥에서 창설되어 의정부까지 남하해 전투를 수행했 으나 지리멸렬한 상태로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사단에 관한 정보는, 제45사단 제75연 대 김유흥 중위 포로진술 FEC, ADVATIS FWD RPT #0177 (28 October 1950) 참조. 98) 라주바예프 보고서 제1권, 242쪽. 99) 평양경위여단 김경섭 소위 포로진술, EUSAK, 164-MISDI-1155 (22 October 1950); 평양 방어땅크연대 김병준 총위 포로진술, EUSAK, 164-MISDI-1148 (22 October 1950). 투입 된 전차 20대는 아마도 제105땅크사단 예하 부대로 평양에 남아 훈련을 담당하던 208땅 크교육연대에 속했던 전차들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