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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102 군사연구 제130집 38선 이북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선은 동서로 양분하여 서부는 서해 안방어사령부 사령관 최용건이 방어를 책임지고, 동부는 38선을 넘어 철원으로 후퇴해 온 전선사령관 김책이 방어를 전담하게 했다. 해군에서는 즉시 동서해안 에 기뢰를 매설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91) 소련군사고문단은 이때부터 평양 방어계 획에 착수했다. 신편 사단들의 편성이 가속화되었다. 군대의 패배심리와 동요를 막기 위해 군대에 대해 직접 당이 개입하도록 했다. 10월 2일에는 ‘비행기가 없어 서 전쟁에 졌다’ 92)고 말한 전선사령부 군사위원인 김일(金一)이 철직되고 박헌영 이 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임명되어 93) 북한군 고위 간부들에 대한 정치사상적 통 제를 강화하기로 했다. 문화훈련국은 10월 7일 총정치국으로 개편되었고, 10월 14 일에는 전 군부대에 문화부 대신 정치부를 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94) 뒤이어 10 월 2일 모스크바는 38선 이남에 남아있는 부대들에 대해서는 북한군 주요 지휘관 들을 북쪽으로 철수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부대들에게는 중장비를 파기 하고 주요 지휘관과 참모들을 산길을 통해 북상시키라는 전문을 평양에 보냈다. 동시에 남한에는 부대를 남겨두어 한·미군의 후방에 대한 유격전을 시행하라는 지령이 내려졌다. 95)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38선과 북한 전역에 대한 방어계획이 수립되고 필요한 부대의 재배치 명령이 내려가기는 하였지만 북한군의 전투능력은 단시일 내에 개 선될 수 없었다. 10월 10일 현재 38도선 북방의 북한군은 숫자상으로는 93,498명 을 헤아리고 있었으나 96) 그 대부분은 전투능력을 기대할 수 없는 신병들이었다. 91) 자유와 독립을 위한 조선 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 , 136쪽; Voina v Koree 1950~ 1953, p.131. 92) 고봉기는 이말이 김일이 강계에 후퇴해 와 허가이에게 한 말이며, 허가이가 이를 김일성 에게 전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점은 아마도 10월 초일 것이다. 그는 이 시기 에 소련고문단에도 소련이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고 대놓고 불평했다. 김일은 전반적으로 ‘문화사업’의 실패한 것과 소련고문단에 대한 불평이 겹쳐 철직되었을 것이다. 편자 미상, 김일성의 비서실장 고봉기의 유서 (서울: 천마, 1989), 44쪽. 박길룡은 다만 정치·교양 사업을 잘못한 죄로 김일이 철직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박길룡·김국후, 김일성 외교비사 (서울: 중앙일보사, 1994), 42쪽. 93) Voina v Koree 1950~1953, p.305. 이 책에서는 총정치국장 ‘박헌영’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고 다만 총청치국장이 새롭게 임명되었다고 쓰고 있지만 그가 틀림없다. 94) V. A. Matsulenko, Koreiskaia narodnaia armiia (Moskva: Voennoe Izdatel'stvo, 1959), p.58. 95) "Ciphered Telegram, Chan Fu (Stalin) to Matveyev(Zakharov), 2 October 1950", CWIHP Bulletin, Issue 6/7 (Winter 1995), p.114. 96) Voina v Koree 1950~1953,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