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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의 원인에 대한 재고찰 12 군사연구 제130집 실상 이러한 변화과정에 가장 고무된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지리적으로 소 련,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41년 이후 소련 지역에 머 물면서 소련군 및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45년 이후 한반도의 38선 이북 지역을 점령하여 김일성이 정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소 련이었고, 스탈린은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직후 김일성과 북한의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불러 북한과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중국 역시 북한의 지도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일성은 1930년대 1국 1당 원칙에 입각하여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경력이 있으며, 1930년대 중국공산당 의 지도하에 있었던 항일 연군에서 활동하였다. 김일성뿐만 아니라 독립동맹 출 신의 연안파 역시 1930년대 후반 이래 중국공산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 다. 7) 게다가 김일성은 중국의 내전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을 적극적으로 원조하였 다. 호치민의 북베트남이 그랬던 것처럼 국공 내전 기간 중국공산당 간부들의 가 족들이 북한 지역에 피신하기도 했고, 중국과 북한 사이의 국경지대는 중국공산 당 군대가 물자를 운반하는 주요한 통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의 핵개발과 중국의 공산혁명은 북한의 김일성을 비롯한 지도부에 자신감을 심어주 는 것이었다. 든든한 후원자가 생긴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대화록의 앞부분은 바로 이러한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공산 진영의 힘이 더욱 커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정세에 대한 판단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이렇게 공산 진영의 힘이 커지면서 미국 내에서도 ‘더 이상 다 른 나라의 일에 개입하지 말자는 여론’이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스탈린이 한 것이었으며,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에서 결정적으로 패퇴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주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개입 여부는 실상 1949년 3월 북한의 대표단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에도 주요한 논의 사항이 된다. 8) 이 회담에서 경제협력과 기술 지원에 대한 논 7) 연안파는 식민지 시기 중국 공산당 중앙이 위치했던 연안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56년 8월 종파 사건 시 이들이 조선노동당으 로부터 숙청되었을 때 중국 공산당은 이에 항의하였고, 이를 통해 연안파들은 1958년 중 국군이 북한으로부터 철수할 때까지 다시 복당되기도 하였다. 8) 1949년 3월 5일 수상 김일성은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부수상 홍명희, 국가계획위원회장 정준택, 상공상 장시우, 교육상 백남운 등 수행단을 대동하고 경제지원, 군사력 증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