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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은 종신집권을 위하여 언론과 사회 전반에 억압적인 조치들을 취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고 대구 도심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를 2·28 대구 학생의거라고 부르고 있는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3·15 마산시위)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함으로써, 마산 시민들의 분노감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결국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고 내무부장관 홍진기로 교체·임명하는 등 정국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월 11일, 마산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김주열 시체 인양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