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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26집 61 등의 소산이었다고 평가된다. 여순반란 사건 직후 시작된 숙군으로 1948~9년 사 이에 파면된 장교가 242명, 불명예 제대한 사병이 4,133명으로 1948년 당시 육군 총원 5만 명의 10%에 해당하는 많은 수자인 것이다. 이런 숙군 작업은 모두 7차 에 걸쳐 단계적으로 단행되었는데 마무리가 된 1954년 10월까지 사법처리(국가보 안법) 된 자가 군인 1,120명이었고 처벌 받은 민간인 까지 합하면 1,677명에 달하 고 있음을 보면 이 당시 군 내외 사회전반에 걸쳐서 이념 갈등대립 질시구도가 얼마나 심각하였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59) 6․25남침 전쟁 중 남한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숙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듣건대 전 대통령 박정희가 광복 직전 한때나마 중국에서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는 저서를 통한 주장 가운데 조갑제나 송남헌 등의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 다.60) 나의 연구에 박정희가 만군이나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중위로 복무한 것은 사실이지만 친일한 단서는 찾을 수 없고 광복군에도 입대하였다는 자료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광복군은 한말의 의병을 계승한 독립군정신을 이어 임정의 정규직할 무장 단위 부대로서 많을 때는 1천여 명이고 적을 때는 4백 명 규모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 나 보다 정확한 숫자 파악은 어려운 것으로 본다. 충칭시기 5년간의 항일투쟁을 줄기차게 펼쳐왔다. 그들은 한국군의 정통을 계승한 한국군의 맥을 이은 기간 군 요원으로 임정의 군사정책을 스스로 감당하고 조국의 독립투쟁을 최일선에서 수 행한 역전의 용사였다.61) 이들은 한때 인도와 미얀마 지역에 파견되어 연합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이 정신을 이어 1948년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그 중 일부가 창 군의 일원으로 중추적인 군 발전에 임무를 수행하여 왔던 것이다. 이범석 최용덕 이 국방부를 맡았으며 이어 김홍일, 박시창, 장흥, 김관오, 안춘생, 이준식, 권준, 오광선, 박영준, 김국주, 장호강, 전성호, 민영구, 김용관, 김영일, 정희석, 박영섭, 한철, 김신, 김동수, 유해준, 이종국, 고시복, 박기성, 최덕신, 채원개, 오동기, 조개 옥 등 다수가 국군의 영관이나 장성으로 입대, 진급하여 광복군의 정맥을 이어갔 다. 왕정위군 출신의 창군 요원으로는 김응조, 이성가 등 뛰어난 장군들도 광복군 주 59) 중앙일보, 2008년 8월 11일. 60) 이현희, 『박정희 평전』, 효민, 2007, 83~4쪽 61) 조항래, 한국군의 창군 맥락과 정통성 계승, 『죽당 이현희 교수 회갑기념논총』, 1997, 동방도서, 901~23쪽.